기획전시


 한국여성의전화는 창립 시부터 아내폭력 문제를 여성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범죄 행위이자 사회문제로 보았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이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 마련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해왔는데 가정폭력방지법 제정 운동은 바로 이런 노력의 정점이었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외국의 입법례를 조사하는 법 제정 초기부터 시행령, 시행규칙을 만들고 법이 시행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전 과정을 담당했다. 법이 시행된 이후에는 법 집행 과정을 모니터링 했고 입법 취지에 맞는 법 시행을 위한 개정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① 기구를 구성하고 법안을 마련하다

1994 가정폭력 방지법 추진을 위한 공개 토론회 자료집 ; 아내구타 아동학대 깨어진 가족공동체

1994 가정폭력 방지법 추진을 위한 공개 토론회 자료집

한국여성의전화는 1994년 UN이 정한 '세계 가정의 해'를 맞아 본격적으로 '가정폭력방지법 제정 운동'을 시작했다. 1994년 5월 6일부터 13일까지를 '가정폭력 추방주간'으로 설정한 한국여성의전화는 광주·대구·전북·인천·여성의전화, 대구여성회, 충북여성민우회, 수원여성의전화(준), 한국아동학대예방협회와 함께 다양한 행사를 전개했다. 한국여성의전화와 함께 추방주간 행사를 전개했던 단체들은 가정폭력 추방주간 행사를 마치면서 가정폭력방지법추진 전국연대(이하 '전국연대')를 결성했고, 한국여성의전화가 간사 단체를 맡았다.

전국연대와 한국여성의전화는 1995년 '가정폭력방지법 입법소위원회'를 구성해 법안을 준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정폭력방지법 제정 운동을 가시화하기 위한 여러 행사를 진행했다. 1995년 10월~1996년 3월까지를 가정폭력방지법 가시화의 시기로 정하고 1996년 4월 총선을 겨냥하며 힘을 모았다. 1995년 초부터 한국여성의전화는 전국의 지부들과 함께 상담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법의 내용을 수집하고 외국의 입법례를 조사했다. 
가정폭력 문제를 법률로 효과적으로 다루고 있던 미국 여러 주의 법안을 번역하고, 우리 현실에 맞는 구조를 다루고자 노력했다. 또 기존의 '여성평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서도 가정폭력방지법에 대한 내부 토론회를 가졌고 그중 2명의 변호사가 법안을 준비해나갔다. 1996년 6월부터 '가정폭력방지법 시안 마련을 위한 전문가 간담회'가 네 차례에 걸쳐 개최됐다.

 

② 연대의 폭을 넓히다

1995 가정폭력방지법제정을 위한 범국민서명운동

1995 가정폭력방지법제정을 위한 범국민서명운동

1995년 11월 25일부터 12월 10일, 세계 여성폭력 추방주간에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7개 지역에서 가정폭력방지법 입법 청원을 위한 거리서명 운동이 전개됐다. 전국연대는 1996년 4월 총선을 맞아 각 당 대표를 만나는 등 각 당이 가정폭력방지법 제정을 공약으로 채택하도록 만들었다. 1996년은 가정폭력방지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키기 위해 전력투구했던 한 해였다. 1996년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이라 한다)이 가정폭력방지법 제정을 1996년 중점사업으로 채택하면서 가정폭력방지법 제정 운동은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전국연대는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여연 안에 가정폭력방지법 제정추진 특별위원회(이하 '특위'이라 한다)를 구성했다.
 
특위는 신혜수 한국여성의전화 회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여연 소속 7개 단체(경남여성회, 대구여성회, 서울여성노동자회, 제주여민회, 강북여성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여성민우회 부서 가족과 성 상담소)와 가톨릭 여성 쉼자리, 아동학대예방협회,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한국노인의전화,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12개 단체가 참여했다. 특위 사무국은 여연 사무국 내에 두고 간사단체는 한국여성의전화가 맡았다. 지역운동본부는 성남, 인천, 울산, 부산, 청주, 경남, 광주, 제주, 수원, 원주, 전주 등 11개 지역에서 결성되었다.
1996 딸을 구타하는 사위를 살해한 이00씨 구명운동

1996 딸을 구타하는 사위를 살해한 이00씨 구명운동

1996년 8월에는 전국의 22개 사회단체가 참여한 가정폭력방지법 제정추진 범국민운동본부(이하 '범국민운동본부'라 한다)가 발족하였다(집행위원장 : 신혜수 한국여성의전화 회장). 이로써 전국의 시민사회단체가 한목소리로 가정폭력방지법 제정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렇게 가정폭력 문제가 전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른 데에는 1996년 5월 이00 할머니 사건의 영향이 컸다.

이 사건은 가정폭력방지법 제정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기폭제가 되었다. 사건을 통해 가정폭력의 범죄적 성격을 분명히 알려내고 가정폭력방지법 제정의 필요성을 전 사회적으로 알려낸 한국여성의전화 활동이 어느 때보다도 돋보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똑같은 성격의 가정폭력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은 조씨 사건은 ‘패륜아’로 매도된 반면, 사위를 살해한 사건은 ‘모정’으로 미화되었다. 우리 사회의 가족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가정폭력에 선택적으로 적용되는지를 잘 보여준 사건이었다. .
1996년 9월 24일, 범국민운동본부 주최로 '가정폭력방지법 시안 공청회'가 열렸다. 범국민운동본부는 법안에 대한 내부 설명회까지 마친 후 전체 5장 50조로 구성된 법안에 85,505명의 서명을 모아 10월 30일, 국회에 청원했다. 이후 신한국당, 새정치국민회의, 자유민주연합의 세 정당에서도 각각 가정폭력방지법안을 제출했다. 각 정당은 임시조치나 보호처분의 도입 등에서 범국민운동본부의 안을 거의 받아들였으나 목적은 상이했다. 신한국당은 가정폭력 범죄의 처벌법과 피해자 보호법을 분리하여 2개의 법안으로 제출했다. 특위에서는 2개의 법안이 함께 통과된다면 이를 구태여 반대하지 않기로 입장을 정했다. 그러나 가정폭력방지법은 1996년의 노동법과 안기부법 파동에 밀리며 회기를 넘기고 말았다.
 
 

 

③ 국회의원들에게 정치적 압박을 가하다

1998 가정폭력방지법 홍보캠페인

1998 가정폭력방지법 홍보캠페인

이에 국회의원들이 가정폭력 문제에 무관심한 것에 대한 맹공격이 이루어졌다. 신한국당 앞에서 '가정폭력방지법 제정 촉구대회'를 개최하고, 국회법제사법위원들을 면담하고, 가정폭력방지법 공청회 개최 요구, 사회 저명인사들의 연명서 제출 등 활발한 대응 활동을 벌였다. 1997년 11월 5일에는 김수환, 강원용, 강문규, 이효재, 윤후정, 김찬국, 강영훈, 서영훈 등의 연명으로 가정폭력방지법 제정을 촉구했다. 범국민운동본부의 줄기찬 노력으로 1997년 11월 17일과 18일,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과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각각 통과되었다. 가정폭력방지법 제정 운동은 그동안 사적인 영역에 머무르던 아내(가정)폭력 문제를 공적인 영역으로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한국여성의전화의 현장성과 이슈의 대중성이 잘 조합되어 드러난 성과였고 또 한국여성의전화의 많은 회원과 한국여성의전화 활동을 지지하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전문가와 운동가들의 열정과 헌신이 만들어낸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