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전시


1987 최초의 쉼터

1987 최초의 쉼터

 

“전처의 아이들이라고 두고 올 수는 없었어요.”

 
아직 가정폭력 피해 여성을 위한 쉼터가 생기기 전의 어느 날, 전화 상담을 했던 내담자가 친딸과 의붓딸까지 세 명의 자녀와 함께 무작정 부산에서 서울역까지 올라와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 전화로 물었다. 여성의전화가 당시 쉼터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언론에 알리고 있었던 까닭에, 쉼터가 이미 있는 줄 알았던 것이다.
 
전처의 딸이라고 해서 두고 올 수는 없었다고 하는 그녀의 온 몸은 벌집처럼 구멍이 나 있었다. 담뱃불로 지진 자국이었다. 그녀는 무조건 있을 곳을 마련해달라고, 갈 곳이 없다고도 했다. 이 여성과 아이들을 돌려보낼 수 없어 여성의전화 사무실 일부를 급히 개조하여 쉼터로 만들었다. 사무실 한쪽에 마련한 쉼터는 고작해야 3,4명을 수용할 수 있는 초라한 장소였지만, 쉼터의 탄생과 그 역사는 사회에서 가정폭력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임을 고발하는 생생한 증거가 되었다.
1987 쉼터 개원 기념 고사 [사진]

1987 쉼터 개원 기념 고사 [사진]

맞을 짓이란 없다

1983년 여성의전화 창립과 실시한 한국 최초의 아내구타 실태조사 결과, 708명의 여성 중 42.2%(299)이 결혼 후 남편에게 구타당했다고 응답했다. 또한 그 발생 빈도나 폭력의 형태가 매우 심각하였다. 여성의전화는 창립 때부터 폭력 피해 여성들을 위한 일시 피난처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는 당시 폭력 피해 여성들이 남편의 폭력을 피해 집을 나와도 갈 곳이 없어 또다시 폭력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절박하게 호소했기 때문이다. 상담의 양이 많아질수록 피난처를 요구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었고 무작정 찾아온 사람들이 회원의 집에 잠시 머물기도 했다.

 

1986년 한 해 동안 면접상담을 한 89명의 피해 여성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남편의 폭력을 피해서 가출해도 오래 있을 곳이 없어서(44.4%) 일주일 이내에 귀가할 수밖에 없었고(63.6%) 갈 곳이 없어서(56.2%) 쉼터를 이용하기 바라는 여성이 대부분(88.8%)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구타 피해 여성들에게 가장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피난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한국여성의전화에서는 쉼터 마련을 위해 지속적인 모금활동을 진행했다.

 

 

1987.3.14

마침내 19873, 방 세 개짜리 가정집으로 사무실을 옮기면서 작은방 하나에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구타당하는 여성을 위한 일시적 피난처인 '쉼터'를 개소하였다. 당시 활동가들은 그 공간의 이름을 쉼터, 영어로 피난처를 의미하는 Shelter와 의미와 발음이 비슷한 이 단어로 명명했다. 쉼터를 열자마자 많은 피해 여성들이 옹색한 공간에서 불편을 감수하며 속속 쉼터를 이용했다. 노출된 사무실에서 쉼터를 운영하다 보니 쉼터 이용자는 많은데 다세대 주택에 15~17명이 머물기도 할 정도로 장소는 턱없이 비좁았다. 그렇지만 쉼터가 최초로 문을 연 후, 한 내담자는 워낙 긴박한 상황에서 집을 나온 터였어서, 시설이 좋고 나쁜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냥 쉴 곳이 있다는 것 자체가 고마웠다고 말했다.

1989년에는 8명까지 지낼 수 있는 곳으로 이사를 했고, 이때부터 쉼터를 위한 단계별 프로그램으로 개인상담, 집단상담, 가정폭력 교육이 정착되었다. 정부의 재정적 뒷받침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한 여성단체가 아내구타 문제를 비롯한 전반적인 여성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 하나만 가지고 운영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어려운 점이 많았다. 쉼터 재정은 해마다 바자회를 비롯한 수익사업을 하거나, 후원회원을 모집해서 충당했다.

 

1997년 가정폭력 방지 특별법이 제정되자 보건복지부는 19988월부터 보호시설 시범사업을 실시하였다. 여성의전화 쉼터(서울여성의전화 중부쉼터)와 봉천복지관의 관악쉼터, 은평복지관의 은평쉼터 등 모두 3개소가 정부에서 임대료와 운영비를 지원받는 시범사업으로 선정되었으며, 이때부터 서울여성의전화 쉼터는 정부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서울여성의전화는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시범적으로 장기 쉼터를 운영했는데, 수유리에 마련된 장기 쉼터는 동반아동과 함께 입소가 가능했으며, 거주기간은 1년이었다. 중부쉼터와 수유리 장기쉼터 두 곳을 운영하다 수유리 쉼터는 독일의 지원이 끝난 이후 재정적인 문제로 폐쇄되었다.

 

장기 쉼터의 운영으로 폭력 피해 여성들의 자립을 위해 지역사회 연계망의 중요성을 깨달았으며, 정부에 자립을 위한 장기 쉼터의 설치와 구체적인 정책을 제안하게 되었다2017년 현재 30주년을 맞은 쉼터는 폭력 피해 생존자의 삶이 쉼터에서의 머무름만으로 끝나지 않도록 쉼터 이후의 홀로서기를 위한 제도적 필요성과, 다양한 자립지원 프로그램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