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폭력 피해여성은 오세요, 단 주민번호도 까세요"[언론기고]


표제 : 2010 "폭력 피해여성은 오세요, 단 주민번호도 까세요"[언론기고]


주제 : 인권지원활동 ; 쉼터


: 미디어운동 ; 컨텐츠생산


: 문화운동 ; 세계여성폭력추방주간


기술 : [세계여성폭력추방주간 한국행사 20주년 기고③] 쉼터 여성 두번 울리는 복지부 '행복e음'

2010년 4월, A씨는 남편의 폭력을 피해 초등학생 딸과 함께 쉼터를 찾았다. 남편은 상처가 드러나지 않는 곳들을 골라 때렸고, 폭력은 점점 심해졌다. 참고 살아보려 했으나 남편이 딸에게까지 물건을 던지고 밀치는 것을 보자,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집을 나온 것이다. 남편이 찾아올까 두려워 쉼터의 도움을 받아 아이는 비밀전학을 시켰다.

어느 날, A씨는 미용실에 들렀다가 병원에 갔고, 몇 시간 후 아이를 데리고 다시 미용실에 갔다. A씨가 미용실에 들어서자, 어느새 남편이 뒤따라 들어왔다. 집을 나온 지 2주 만에, A씨는 남편에게 끌려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남편은 아내를 찾아냈을까. 그는 아내를 집요하게 추적했다. 아내의 휴대전화와 카드 사용 내역을 주시하고 지인들을 탐문했다. 결국 미용실에서 A씨 카드로 결제가 된 사실을 알자마자 쫓아온 것이다.

A씨의 사례에서 보듯, 카드는 물론이고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찾는 것도 위치를 바로 알리는 것이 된다. 소도시에 사는 가해자들은 아이가 갈 만한 학교 리스트를 뽑아서 수색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아내가 자살한다고 나갔다고 거짓 신고하여 119의 도움을 받거나, 실종신고를 내 경찰의 도움을 받아 아내를 찾기도 한다. 집요한 폭력을 감당하던 여성이 집을 나오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탈출이다. 그러나 이후에 이 여성을 지원해야 할 국가가 오히려 여성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전자정부, 여성의 안전을 위협한다.

2008년부터 여성가족부는 여성폭력피해자를 지원하는 상담소와 보호시설에 정부의 행정시스템을 이용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보건복지가족부 2008년 '새올행정시스템'으로 출발한 이 시스템이 2010년 1월 4일부터 본격 운영되고 있는 보건복지가족부의 '행복e음'(사회복지통합관리망)이다. 여기에는 쉼터 입소자의 이름, 주민등록번호, 입·퇴소일을 기록해야 한다.

보건복지가족부는 복지업무를 전자로 처리하기 위해 이 시스템을 도입했단다. 정부부처는 각 사회복지시설에 인터넷시스템을 이용해 피해여성들의 정보를 입력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대부분 사회복지시설들은 정보집적을 꺼려 수기로 정부기관에 보고 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전자정부화 시책이 폭력피해여성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 데 있다. 가정폭력피해자의 경우 쉼터 입소 정보가 노출되면 당사자의 안전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 정부는 대안으로 보안을 강화하고 개인정보 유출 시 책임자를 엄하게 처벌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해킹보다는 정보 취급자에 의한 정보 유출이 비일비재한 데다가 가정폭력 피해자의 정보가 유출될 경우, 책임자를 처벌한다고 하지만 사후약방문에 불과하다.

한 신문이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2007년~2009년 공공기관에서 개인정보보호법을 위반한 건수는 321건. 이 중 개인정보 취급자가 개인정보를 부당한 목적으로 사용한 경우가 43%로 가장 많았다. 올해 8월 9일자 <연합뉴스>는 구청 공무원이 심부름센터 운영자에게 주민번호를 제공하며 건당 50만 원 안팎을 받아 챙긴 사건을 실었다. 약 3년 동안 그 공무원은 300여 건의 개인정보를 팔았는데, 전산으로 전 국민의 정보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폭력피해여성, "정보집적 원치 않아"

정보집적 때문에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신변에 위협을 느끼는 경우는 많다. 뿐만 아니라 성폭력·성매매 피해여성들도 자신의 개인 정보가 정부의 서버에 남고 이것이 누군가에게 알려질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여성폭력피해자지원시설 전자정부화대응모임이 올해 10월 12일부터 20일까지 여성폭력피해쉼터 입소자 시설(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 58개소, 성매매피해자보호시설 8개소, 성폭력피해자보호시설 3개소 등 총 69개 시)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419명 중 334명이 자신의 개인정보를 제공하고 싶지 않다고 응답했다.

응답자의 45%는 입소 정보가 정부 서버에 남으면 입소할 의향이 없다고 답했다. 그 이유를 보면, "시스템을 통해 혹시라도 내가 어디 있는지 가해자가 찾아낼까봐 두려워서"(34%), "내 개인정보가 정부 서버에 남는 것을 원치 않아서"(33%), "내 정보가 노출되어 내가 쉼터에 있었다는 사실을 누군가가 알게 될까봐"(31%)의 순이었다.

정부 서버에 개인정보가 남더라도 입소할 의향이 있다고 답한 사람은 55%. 그 중의 66%는 "(정보를) 제공하고 싶지 않지만 쉼터 외에는 갈 곳이 없으므로 어쩔 수 없어서"라고 응답했다. 이 여성들은 쉼터에 입소할 때 이름과 주민번호 등을 적고 금융정보를 제공하겠다는 동의서를 쓴 사람들이다. 결국, 정보를 제공하는 여성들은 가정폭력 때문에 더 이상 집에 있을 수도 없고 돈도 없어 쉼터에 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을 하는 것이다. 정부는 왜 굳이 여성들의 주민번호를 '행복e음'에 입력하는 걸까?

정부의 자산조사 때문에 두 번 우는 폭력피해여성들

'행복e음'은 복지서비스를 받은 이력을 개인별·가구별로 관리하고 복지대상자 선정을 위한 소득·재산 조사가 가능한 행정폐쇄망이다. 사회복지담당 공무원들은 '행복e음'을 통해 등록된 대상자들의 금융정보, 신용정보 및 보험정보를 한 번에 조회할 수 있다.

현재 쉼터에 입소한 여성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따라 소득인정액이 최저생계비 이하일 때에만 정부로부터 생계급여(주·부식비+피복비)와 1종 의료급여를 받을 수 있다. 생계급여는 최소한의 생계를 위한 비용으로 하루 4280원이며, 1종 의료급여증이 있으면 월 6000원 내에서 무료로 진료를 받을 수 있다. 정보를 한꺼번에 조회할 수 있다는 편리함 때문에 '행복e'음 서비스 이용을 권장하지만 실상은 여전히 폭력피해 여성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여성단체들의 지속적인 문제 제기로 가정폭력·성폭력특별법이 개정되어 2011년부터는 자산조사에 걸러져 수급자 지정을 받지 못하는 여성들도 생계비와 양육비 등은 지원받을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7조의5, 성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14조). 그러나 여전히 자산조사 절차는 남아있고, 내년에도 폭력피해여성의 개인 정보는 '행복e음'에 집적될 것이다.

한 성매매쉼터 입소자는 설문조사 기타 응답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사회에서 받은,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 도움 받고자 해서 입소한 것이다. 쉼터를 통해 내 개인 정보가 유출되고 내 인권이 또다시 손상되고 세상에 알려진다면 입소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 여성들이 개인정보 집적을 반대하며 입소를 거부할 때, 달리 갈 곳은 없다.

2010년 1월 4일, 보건복지부장관은 "'행복e음'은 '맞춤 서비스로 가는 새로운 시스템'"이라며 "사회복지담당공무원들이 지금까지 복지급여 지원 기준에 해당되는지 안 되는지 조사하는 일에만 매달리던 것에서 벗어나 직접 어려운 분들을 만나는 등 진정한 사회복지로 갈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과연, 피해당사자가 복지급여 수급자 기준에 해당하는지 조사하느라 위기 상황에 있는 폭력피해여성들이 주민등록번호 제공에 '동의'하도록 만드는 것이 과연 피해여성들을 위한 맞춤서비스인가.

생계급여와 의료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시행규칙 특례규정을 둔다면, 입소여성의 주민등록번호를 시스템에 입력하지 않고도 재정 지원이 가능할 것이다. 폭력피해여성들을 지원하는 것은 '폭력'이라는 위기 상황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여성폭력피해자들의 현실을 고려한 제도를 마련하지 않는 한, 보건복지부가 추구하는 '진정한 사회복지'는 요원할 것이다.


생산자 : 현정 한국여성의전화 활동가


날짜 : 2010-12-08


파일형식 : 언론기고


유형 : 문서


컬렉션 : 언론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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