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이런 춤이 가능하다니...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몸짓[언론기고]


표제 : 2014 이런 춤이 가능하다니...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몸짓[언론기고]


주제 : 미디어운동 ; 컨텐츠생산


: 여성인권영화제 ; 8회영화제


: 문화운동 ; 기타문화


기술 : 이 다큐멘터리는 캐나다 무용단 아이댄스(iDANCE Edmonton Integrated Dance)의 작품 <춤추는 별자리>에 관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무용은 탁월하게 예쁜 몸매를 지닌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우리의 생각이 편견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멋진 작품이 한 편 있다.

무대에 막이 오르면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장면이 나타난다. 다양한 몸을 지닌, 휠체어에 탄 무용수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어떤 무용수는 걷지 못하고, 다른 무용수는 팔을 펴지 못하며 또 다른 무용수는 아예 하체가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춤은 인간의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경지를 보여주며, 관객으로 하여금 몸이 무엇이고 춤이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감동의 눈물과 함께 새로운 성찰이 다가온다.

감격이 각별했던 포스트모던댄스 <춤추는 별자리>

무용작품 <춤추는 별자리>에서 주로 사용한 춤 메소드는 접촉즉흥(Contact Improvisation)이다. 미국의 스티브 팩스톤(Steve Paxton)이 창안한 포스트모던댄스의 주요 기법으로 인간의 몸이 서로 접촉할 때 즉흥적으로 생겨나는 동작을 즐기는 방식이다. 포스트모던댄스의 특징은 춤을 전문 무용수의 영역에서 해방시켜 누구나 춤을 출 수 있게 열어 놓은 것이다.

접촉즉흥 춤은 신체장애를 가진 이부터 전문 무용수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이 가능한 열린 기법이다. 그런 점에서 <춤추는 별자리>는 포스트모던댄스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특히 필자는 신체장애를 가진 무용수와 함께, 발레 '그녀가 온다'를 안무한 경험이 있는지라 이 다큐멘터리를 본 이후의 느낌이 각별했다.
편견이 작동하는 사람들이 볼 때는 아이댄스가 '장애인 무용단' 같지만 그들 스스로는 무용단 이름 앞에 '장애인'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는다. 이들은 과연 어떤 상태가 장애이고 아닌가에 대해 근본적으로 문제제기를 한다. 장애가 조금 있다고 '장애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런 기준은 누가 만들어 놓았나.

인간은 누구나 돈, 가정, 애정, 사업 등의 문제를 안고 살며, 몸에 불편한 부분이 있는 것은 여타의 여러 문제 중 하나일 뿐이다. 다른 문제를 풀지 못할 때는 '장애인'이라 지칭하지 않으면서 몸의 불편함이 있을 때는 '장애인'이라 명한다. 이처럼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기준은 많은 사람에게 억압으로 작동한다. 더구나 인간은 누구에게나 생명의 힘이 있고, 그 힘으로 몸의 불편은 거뜬히 극복할 수 있다.

몸은 생명과 사랑을 알게 하는 현장

몸이란 무엇인가. 몸학(學)의 창시자 토마스 하나(Hanna, T. 2003~04)가 강조했듯이 생명은 몸의 형태로 세상에 들어왔다. 따라서 몸은 인간에게 가장 처음 각인되는 생명의 모양이다. 생명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몸으로만 존재한다. 인간은 몸을 통하여 느끼고, 보고, 만지고, 생각하고, 말하고 세상을 경험한다. 몸은 그 자체로 현존이다.

그런데 그 몸은 가지각색의 모양으로 개인을 드러낸다. 그 가지각색은 그저 차이일 뿐이지 차별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니체가 강조했듯이 인간은 몸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몸이 바로 인간인 것이다. 또한 생명체인 몸은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움직인다. 움직이면 살고 정지되면 죽는다. 몸을 아는 것은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을 아는 것으로, 세상을 변화시켜나갈 잠재력 역시 바로 몸 속에 있다.

몸을 제대로 알게 되는 순간 불쌍한 사람에 대한 연민(sympathy)을 가지며 스스로 '불상(佛像)'이 되며 세상을 변화시킬 한 축이 된다. 다큐멘터리 <춤추는 별자리>는 이렇듯 몸에 대한 이해가 인간 삶에 대한 이해의 핵심이고 몸은 바로 사랑과 생명임을 보여준다. 그렇다. 몸은 생명과 사랑을 알게 하는 현장이며. 지금 여기의 내 몸을 중심으로 모든 것들과 통섭이 이루어진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추는 춤, 춤에 '장애'란 없다

춤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움직임은 그 어떤 형태의 것도 춤이 될 수 있다. 춤을 출 수 있다는 것은 생명의 확실한 확인이자 가장 큰 축복이다. 생명체는 독자적으로 움직이지만 동시에 주위 환경과 상호작용을 한다. 춤은 여러 몸들이 모여 함께 이루어내는 것이다. 아이댄스의 무용수들은 현 시대에 통용되는 무용의 규범적 기준과 그에 맞춰 춤추는 방식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다.

이들은 정해진 동작을 배워서 따라 하기보다는 내면에 있는 어떤 것을 스스로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표출하려고 한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춤을 추며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을 얻는지 보여준다. 이는 바로 적용이 되어 혼자서 일상생활을 꾸려나가는 데 도움을 준다. 사람에게는 개인마다 장벽을 돌파하는 나름대로의 방식이 있는데 이것은 더 좋고 나쁜 것이 있기 보다는 그저 '다른' 것일 뿐이다.

아이댄스의 단원들에게 몸의 불편함은 춤에 대한 장애가 아니라 오히려 춤의 개념과 영역을 확장시키는 동인이 된다. 인류시작부터 존재한 춤이 언제부터 '키 크고 얼굴 예쁜 무용수가 무서운 선생이 지시하는 동작을 따르는 것'이 되었나? 누가 언제부터 춤을 무대에 가두고 무용수만의 전유물로 취급했던가? 아이댄스의 단원들은 어디서든 저절로 나오는 동작으로 춤을 만들어낸다.

춤을 잘 추겠다는 생각조차 비우고 그저 저절로 추는 춤, 그런 춤이 지닌 진정성이 감동을 자아낸다. 욕심을 부리지 않을 때 더 훌륭한 춤이 나온다는 사실을 관객은 눈앞에서 보고 받아들이게 된다. 다큐멘터리 <춤추는 별자리> 속 이들은 생명의 힘을 가장 극대화 하는 방식으로 춤을 해방시켰으며 춤이 머리가 아니라 몸에서 나온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인류는 끊임없이 진화한다. 진화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름다움이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인간 누구나 고통과 고독을 안고 산다. 이 지독한 고통과 고독을 극복하여 고요함과 겸허함을 갖고 진정한 평온함에 도달하는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 아닐까. 다큐멘터리 <춤추는 별자리>에서 척추도 없이 관절염으로 고통 받는 무용수가 춤을 추며 영혼의 행복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 대목에서는 뭉클 눈물이 흐른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아름다움 아니겠는가!


생산자 : 조기숙 이화여자대학교 무용과 교수


날짜 : 2014-9-23


파일형식 : 언론기고


유형 :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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