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당신과 나의 이야기[언론기고] · 아카이브 문



2015 당신과 나의 이야기[언론기고]


표제 : 2015 당신과 나의 이야기[언론기고]


주제 : 미디어운동 ; 컨텐츠생산


: 여성인권영화제 ; 9회영화제


: 여성폭력추방운동 ; 가정폭력


기술 : 상영시간이 십분 남짓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큰 부담 없이 이 영화의 리뷰를 맡았다. 러닝타임이 짧으니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그리 복잡하지 않을 것이라는 나의 무지함이 곧 부끄러움으로 돌아왔다.

영화 <리슨>과 <나의 침묵>은 10여 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담아야 할 '모든 것'을 담아냈다고 할 만큼 충분하고 벅찬 영화다. 숨 막히고 답답한 그 시간을 '무력하게' 견디는 사이 폭력은 관객들에게 그 존재감을 온몸으로 전달한다. 영화를 '보기만'할 뿐, 화면 속으로 들어가 '진실은 그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도, '쫌! 뭐라도 좀 해봐'를 외칠 수도 없는 관객들은 속이 까맣게 탄다.
타인의 고통은 묘하게도 말이 아닌 몸으로 전해진다.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게 바로 타인의 고통이다. 비록 전해 받은 고통이 자의적인 해석으로 인해 왜곡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런 왜곡의 가능성이 타인의 고통을 부인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피해를 호소하는 이들은 각기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하며 언어는 그런 많은 방식 중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표정, 몸짓, 눈빛, 눈물, 질병, 습관 등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갇혀있는 몸의 소리들이다. '즐겁다'라는 말을 내뱉기 전에 몸은 이미 즐거움을 말하며, 통역사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입으로 하는 말과 달리 몸이 하는 말에는 번역기가 필요 없다. 통역자의 농간에도 불구하고, 지켜보고 있던 경찰이 부르카를 쓴 여인의 호소를 알아챈 건 부르카 여인의 목소리와 몸짓이 고통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르카에 가려져 그녀의 아무것도 볼 수 없고 그녀의 어떤 말도 알아들을 수 없지만, 목소리와 몸짓은 그녀의 고통을 전하기에 충분했다.

언뜻 보기에 영화는 여인의 말을 통편집하는 통역자를 비난하는 것 같지만, 통역 없이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인간의 '들을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이 영화가 전하는 중대한 메시지다. 통역 없이도 피해자의 호소는 감지 가능하지만, 이것을 고의로 기각하는 권력의 작동방식이 매우 다채로워서 그것을 '듣는' 일에는 훨씬 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게 핵심이다.

엄마의 고통을 지켜본 아들, 그걸 전해 들은 통역자, 보지 않고 듣지 않아도 알아채는 경찰. 그들에게 부르카 여인의 고통은 이미 '전해졌다'. 그런데도 아들은 아버지에게 위치를 알리고, 통역자는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내고자 하며, 경찰은 너무 쉽게 그녀의 도움 요청을 포기한다.

"전 남편과 전 애인으로부터 폭력을 당한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와서 그녀가 겪은 일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경찰의 대꾸에서 그들이 이미 이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도 그들은 집에 갈 준비가 되었다는 통역자의 말을 믿고(싶어) 안도한다. 부르카 여인의 목소리가 커진 것은 그런 그들의 '분위기'에서 자신이 곧 집으로 돌려보내질 것을 감지한 바로 그때였다. 아들, 통역자, 경찰의 선택은 고통에 대한 편의적인 자가진단과 그것에 대한 성급한 봉합이었다. 그들의 성급한 봉합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나의 질문은 들리는 데도 듣지 않는 적극적인 회피인 그곳에 머문다.
피해를 두텁게 만드는 사람들

어쩌면 고통의 그런 속성 (잘 감지되고 외면하기 어려운 속성) 때문에 고통에 대한 '의도적인' 외면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겠다. 고통에 전염될까봐, 그것이 나의 문제가 될까봐 두려워 타인의 고통에 눈감으려 하고 남의 일이라며 거리 두는 일에 매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아일란 쿠르디의 마지막 모습이 나에게 그러했듯이, 나를 무력하게 하는 거대한 힘 앞에서 적절한 내 할 일을 찾지 못한 이들의 적극적인 자기방어일 수도 있겠다. 그런 거추장스러운 이유를 대지 않더라도 종종 우리는 그냥 '무서워서', '가족이니까', '신의 뜻이라서' 폭력과 마주하는 일을 주저한다. 적어도 폭력을 서둘러 봉합하고 외면하고 거부할 만한 이유들이 그것과 대면하고 해석하고 맞서야 하는 이유들보다 많다.

하지만 폭력의 외부로 자신을 애써 밀어냈던 하루하루는 결국 내가 폭력과 '본의 아니게' 접촉하는 하루하루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본의 아닌' 접촉이란 별다른 해석 없이 움직이는 대로의 폭력-질서에 몸을 싣는다는 의미다. (그래서 나와 폭력의 소극적인 만남이 그래서 대체 어떤 일을 하느냐고, 그래서 뭐가 문제냐고 적극적으로 반문하자.)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폭력은 폭력이 일어나는 그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일 것이다. 폭력이 일어나는 그 순간은 피해가 일어나는 나는 시작점에 불과할 뿐이라는 걸, 피해를 심화시키고 완성한 건, 피해를 피해로만, 피해자를 피해자로만, 그 상태 그대로 남겨두려는 견고한 침묵의 벽이라는 사실 말이다.

폭력을 폭력이라 부르지 않는 것, 그것을 집안일로 여기는 것, (죽음이 턱 앞에 찬 그 순간까지도) 문제를 사소화하는 것, 그래서 아들인 자신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는 것, 혹은 그 문제를 아무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 여기는 것, 경찰도 도무지 복잡해서 피해가고 싶은 것, 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는 것,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폭력 이야기에 고민 없이 몸을 싣는 일은 얇아져서 사라질 수도 있는 '피해'들을 더 심각하고 두껍게 만드는 일에 기여한다.

생각해보자, 폭력-가해가 일어나는 그 순간은 치유가 시작되는 순간이어야 한다. 피해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딛고 일어나야 하는 순간인 거다. 넘어진 사람은 일어나야 하고 옆에 있는 이는 일어나려는 이를 일으키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게 옳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넘어진 이들을 주저앉힌다.

부르카를 두른 여인의 피해는 끔찍한 일을 당했던 그 순간에 시작된다. 피해를 멈추기 위한 그녀의 발화는 종교의 이름으로, 가족의 이름으로, 규범의 이름으로 일관되게 삭제됐다. '이맘(이슬람 교단 조직의 지도자)에게 말해준다'는 통역사를 지나, 소란피우지 말라는 경찰의 말을 거쳐, '아버지가 데리러 올 거예요'라는 아들의 말에서 그녀의 피해는 정점을 찍는다. 희망을 품고 있을 때, 피해는 심각하지 않다. 심각한 피해는 그런 희망이 수차례 반복적으로 꺾였을 때 온다.

봉합, 침묵
그리고 너와 나의 고립

'희망'이 꺾인 '심각한 피해'를 영화 <나의 침묵>에서, 그 어머니의 침묵에서 발견한다. 아들의 분노 앞에 무력한 엄마의 6분은 그렇게 흘러간다. (목격자로 연루된 우리가 견뎌내야 할 시간은 불과 6분이다.) 무얼 해야 할지 몸 둘 바를 몰라 빨래만 만지고 있는 엄마의 6분은 이미 아들의 분노에 장악된 몸으로, 그렇게 이해된다. 아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이전부터 쇼파에 앉아 빨래를 개는 엄마의 눈빛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예측한다.

영화 속 엄마의 눈빛과 미묘한 움직임에서 아들과 엄마 둘 사이 관계의 역사가 읽힌다. 어머니의 침묵과 어머니의 불안, 어머니의 고립은 그가 폭력-피해를 경험해온 오래된 방식이기도 하다. 아들의 (며느리에 대한) 폭력 앞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그녀를 '옳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방관자라고 비난하기는 어렵다.

그가 해왔을 노력을 알 것 같기도 해서, 6분 내내 나는 그녀를 원망하면서도 그녀에게 몰입되었다. 쉽게 폭언이 일어나는 장소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건, 그녀의 몸이 '그렇게는 움직일 수 없는 방식으로' 움직여왔기 때문이고,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을 때가 많다.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한마디 말로 설명되지 않는 수많은 이유가 있다.

최대한 몸을/목소리를 작게 만들라는 여성들을 향한 사회의 요구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는 망언, 가정의 행복을 통해 존재를 입증해온 여성의 삶과 그 와중에 맞딱드린 남자/남편/아버지/아들의 폭력은 그것마저도 책임져야 할 주체로 여성/아내/어머니를 호명해왔다.

폭력을 책임지는 방식은 그녀가 가족을 보살피는 것과 분리될 수 없었다. 가해자를 보살피면서 폭력을 책임져야 하는 위치, 그 위치에서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채로울 수 없다. 더욱이 가해자들이 피해자에게 요구하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자신을 두려워할 것, 그래서 자신의 말에 따를 것, 따르는 것 외에는 행하지 말 것, 맞서지 말고 견딜 것을 요구한다. 가해자의 통제하려는 의지와 가해자를 보살펴야 한다는 사회의 명령 사이에서 피해자가 도달하는 곳은 침묵일 때가 많다.

아무도 가만히 있으라 말하지 않았지만 가만히 있는 것이 옳다고 믿어지는 세계에서, '가만히 있었다'는 비난까지 받아야 하는 일은 피해자의 몫이 됐다. '침묵' 덕분에 말이다. 폭언을 '들어주고' 두려움을 견디면서, 가해자를 달래며 살아내는 것 외에 폭력/가해자를 보살피는 '다른' 방법은 무엇일 수 있을까.

아들이 나간 뒤 둘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며느리는 거실에, 어머니는 조용히 2층으로 향한다. 둘의 공간이 분할되고, 동시에 화면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장면은 둘의 고립이 가져올 존재의 삭제를 상징하는 것 같아 한없이 슬프다. 거실은 어머니의 과거로, 2층은 며느리의 미래로 이어질지도 모를 그 상황이 갑갑하다. 둘 중에 한 명은 침묵을 깨야만 했다. 어머니가 거실로 향하든, 울던 여인이 2층을 향하든 폭력과 만나는 다른 방법을 감독은 발견했어야 한다. 나는 전하고 싶다. 폭력을 경험하는 '다른' 방식은 분명히 있으며, 그건 둘의 만남에서 시작할 수 있다고 말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당신의 이야기, 당신 곁에선 나의 이야기

나를 포함해서 많은 이들이 폭력에 무관한 줄로 알고 살아가지만, 실은 '우리'는 폭력과 꽤 적극적으로 연루되어 있다. 가정폭력 생존자 레슬리 모건 스테이너가 테드 강연의 마지막에 "강연 내내 여러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고 거울의 방향을 돌렸듯이, 폭력에 대해 듣고, 말하고, 전하고, 설명하고, 평가하는 한 폭력은 나의 문제가 아닌 게 되기 어렵다. 나의 움직임이 심각한 피해를 만들어가는 데 기여하는지, 아니면 피해를 심화시키기보다 극복 가능한 방향으로 만드는 일에 보탬이 되는지 숙고할 시간이 왔다.

누군가의 도움 요청을 나는 (그것이 도움 요청임을) 알아차렸는가, 알아차리고 무엇을 했는가, 회유했는가, 침묵했는가, 방법이 없다고 여겨 거리를 두었는가. 그것에 대한 답은 종종 지금 내가 처해있는 상황을 통해 밝혀지곤 한다. 나의 오래된 침묵은 나에게 그런 고통이 닥쳤을 때 침묵의 결과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그제서야 '나'는, 그것이 '너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였음을 알아차리게 될지도 모른다. 너의 곁에 가는 일이 나의 고립을 구조화하는 일임을 알아차리는 일이 그제야 가능할지도 모르는 거다.

반면에 '너'의 곁에 늘 서 있는 일은 '너'가 내 곁에 있는 공간을 남겨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도와줄까?"
"괜찮으시다면요."

이 대화는 두 영화의 마지막에 다시 울렸어야 한다. (너에게) 곁에 있으라고 강요하지 않으면서, (내가) 곁에 있겠다고 우기지도 않으면서, 너와 나 사이 공간을 열어두는 이 대화는 폭력을 넘나들 수 있는 다른 삶과 다른 관계의 시작을 알린다. 둘이 만날 거라는 걸, 둘은 시작할 거라는 걸, 둘은 달라질 거라는 걸, 피해는 얇아지고 폭력은 그칠 것을 암시한다. 변화는 홀로 오지 않는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말을 쏟아내는 이들의 곁에서, 거실에 주저앉은 이 곁에서 당신과 내가 꺼내야 할 한마디가 바로 이것이어야 하는 이유다.


생산자 : 김홍미리 여성주의연구활동가


날짜 : 2015-9-15


파일형식 : 언론기고


유형 : 문서


컬렉션 : 언론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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