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아내는 가정보다 소중하지 않았다, 법 앞에서는[언론기고]


표제 : 2016 아내는 가정보다 소중하지 않았다, 법 앞에서는[언론기고]


주제 : 미디어운동 ; 컨텐츠생산


: 여성폭력추방운동 ; 가정폭력


: 문화운동 ; 5월 가정폭력 없는 평화의 달


기술 :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 ③] 이혼 중인 아내폭력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하는 제도
남편으로부터 폭력을 당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주변 일상에서 종종 들렸다. 우리 사회에서 아내폭력은 으레 일어나는 일이었고, 그만큼 광범위하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아내폭력은 그러나 여성들이 남편의 폭력으로 크게 다치거나, 목숨을 잃는 데까지 이르러서야 사건화되어 세상에 드러났다. ‘끔찍한’ 아내폭력 사건들만이 사람들의 뇌리에 남았다. “왜 집을 나오지 않았는지”에 대한 물음이 떠다녔다.

아내폭력 근절을 위해 국가가 한다는 ‘최선’은 가해 남편을 상담하고 교육해서 ‘나쁜 손버릇’을 고치도록 하는 게 고작이었다.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은 가정이었다. 여성들이 폭력을 당하는 건 그럴 수 있거나, 혹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가정을 지켜야지”란 언설 속에서, 폭력을 경험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종종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아내폭력은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었지만, 폭력을 경험하는 것이 여성들에게 어떠한 의미인지는 누구도 잘 몰랐다. 아내폭력은 오래된 일이었지만, 폭력이 여성들의 삶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는지에 대해선 누구도 잘 몰랐다.

폭력을 경험한다는 것

여성들에게 남편의 폭력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언제고 폭력이 발생하리라는 긴장과 두려움은 일상적이어서 익숙한 것이기도 했다. 여성들은 남편의 폭력에 대한 일상적인 불안과 두려움을 감당해야 했다. 폭력이 일어나는 순간 여성들은 공포로 몸이 굳어졌다. 그 순간을 어떻게든 견디는 것이 최선이었다.

여성들의 삶은 달라졌다. 폭력을 경험하기 이전의 세상과, 경험한 뒤의 세상은 달라졌다. 생존은 여성들의 주요 목표가 되었다.

여성들에게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사회에서 여성은 누군가의 ‘아내’이자 ‘어머니’로 존재했다. 뿌리 깊게 붙박인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온전히 벗어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혼한 여성에 대한 편견이 따라붙을 것이 보였다. 여성들 어느 누구에게도, 발걸음을 떼어 가정을 ‘탈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성들 중 누군가는 폭력에서 탈출을 시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성들은 곧 위험에 노출됐다.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할 경우, 여성들은 생명을 위협받거나, 심지어는 목숨을 잃었다.

지난 3월에는 한 여성이 별거 중인 남편을 만났다가 24시간이 넘게 지하 창고에 갇혔다. 이혼소송 중 양육권 등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여성은 남편으로부터 인두로 고문을 당하고 흉기로 폭행당해 전치 4개월에 달하는 중상을 입었다. 병원에 입원한 여성의 옆에서는 남편이 흉기를 들고 신고하지 못하도록 지키고 서 있었다. 여성은 일주일이 지난 뒤에야 틈을 타 경찰에 남편의 폭행 사실을 신고할 수 있었다.

여성들이 남편의 폭력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할 때, 위험은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다. (자신의) 가정을 떠나려는 여성에게 분노한 가해자는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죽이겠다’며 협박하고, 실제로 여성을 스토킹하여 추적한다. 여성들에게 가해자의 협박과 추적은 실존하는 두려움이며 공포다. 나의 생명이 가해자로 인해 언제고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불안은 여성들이 운신할 수 있는 폭을 극히 좁힌다. 여성들에게, 가해자의 폭력은 종료되지 않았다.

가해자를 맞닥뜨리게 하는 법원

폭력에서 탈출한 여성들은 법원에 의해 가해자와 다시 맞닥뜨리게 되기도 한다. 여성들은 남편의 폭력에서 어렵게 피신해 이혼소송을 낸다. 와중에도 여성들은 재판 중 변론이나 조정 기일이 잡히면 가해자를 ‘대면’해야 한다. 그러나 법원은 이에 더해 여성들에게 가해자와 함께 상담을 받으라며 부부 상담 명령을 내리고 자녀 면접교섭권을 가해자에게 부여하며 여성들을 그들의 안전과 생명을 위협하는 가해자에게로 ‘돌려보내고’ 있다. 때문에 여성과 자녀들이 피신한 쉼터, 비밀전학한 학교, 보육시설도 노출되면서, 여성과 자녀들의 안전이 보장되기는커녕 오히려 위험에 빠지는 일이 벌어진다.

공포스러운 상황을 앞두고 여성들은 불안으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거나, 몸에 통증을 느끼는 등 온몸으로 위험을 예감한다. 물론 가해자를 대면한 상황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폭력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가해자의 행위 여하에 달린 것이기에 여성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성들이 가해자를 대면할 때 공포는 이미 그 공간에 스며들었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분절돼 있지 않았다. 여성에게 폭력을 경험한다는 것은 폭력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고, 일어날 것을,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매순간 예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부부 상담 명령을 내리고 가해자에게 자녀 면접교섭권을 부여하고 있는 법원으로 인해, 여성들의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지원했던 2013년 김영희씨(가명) 사건이 그랬다. 아내폭력 피해자인 김영희씨는 자녀들과 함께 쉼터로 피신해 이혼소송을 냈으나, 법원은 재판을 멈추고 10회기의 부부 상담 명령을 내렸다. 결혼생활 14년 동안 남편에게 지속적으로 폭행당하고 수없이 목을 졸렸으며, 칼을 든 남편에게 협박당했던 김영희씨에게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영희씨는 “어린이날 하루만 아이들과 함께 집에 돌아와 지내면 이혼해주겠다”는 남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집으로 돌아간 날 새벽, 김영희씨는 남편에게 목을 졸려 목숨을 잃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12월, 서울 구로구 오금교 인근 차량에서 여성과 아이가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은 다름 아닌 면접교섭권을 빌미로 가해남편이 재혼한 여성과 자녀를 찾아와 납치 후 살해한 사건이었다.

여성가족부의 2013년 가정폭력 피해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아내폭력 피해여성들은 별거 또는 이혼을 위한 필요 서비스를 묻는 설문에 ‘경제적 지원’(75%), ‘주거지원’(65.5%) 다음으로 ‘가해자의 접근 차단’(64.3%)을 꼽았다. 그럼에도 ‘가정’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사회가 여성의 생명을 방기하고 있다. 아내폭력 피해여성의 이혼 과정 중 부부상담을 제한하고, 자녀에 대한 가해자의 면접교섭권을 배제하는 내용으로 가정폭력피해자보호법을 개정하는 것은 한시가 급하게 이루어져야 할 사안이다.

‘아내’의 생명권을 보장하라

대한민국 헌법은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법 앞에 평등하며,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인권을 확인하고 보장할 의무를 진다.’

아니다. ‘아내’의 생명은 존엄하지 않았다. 아내의 인간으로서의 가치는 ‘가정’보다 소중하진 않았다. 그래서 쉽게 간과됐다. 아내는 남편과 평등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국가는 아내의 인권엔 큰 관심이 없었다. 폭력 가해자를 기껏 ‘상담’ 정도로 달래어(!) 가정으로 돌려보내는 제도 속에서 ‘가정폭력 근절’은 빈 구호로만 남았다.

그래서 ‘아내’의 생명권과 인권을 보장하라는 외침은 당연한 얘기 같지만 당연하지 않다. 오늘에도 여전히 여성들은 자신의 안전과 생명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매일을 분투한다. 모두는 지켜보고, 기억할 것이다. 여성들을 폭력이 벌어지는 가정에 그대로 두거나, 돌려보내는 사회가 빚는 참상을 잊지 않을 것이다. 끝없이 얘기할 것이다. 바꿔낼 것이다. 그래서 ‘아내’들의 생명과 인간으로서의


생산자 : 장유미 한국여성의전화 인권정책국


날짜 : 2016-6-7


파일형식 : 언론기고


유형 :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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