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가부장제를 넘어선 포스트 가부장제, 건강한 가부장은 가능한가 [언론기고]


표제 : 2016 가부장제를 넘어선 포스트 가부장제, 건강한 가부장은 가능한가 [언론기고]


주제 : 여성인권영화제 ; 10회영화제


: 미디어운동 ; 컨텐츠생산


: 문화운동 ; 가족문화


기술 : <안토니아스 라인>은 네덜란드의 감독 마를린 호리스의 1995년도 작품이다. 이듬해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과 토론토 영화제 작품상을 수상하였고, 한국에는 1997년에 개봉되었다. 이후 페미니즘 영화의 정전으로 회자되면서, 2009년에는 '관객이 뽑은 예술영화'로 선정되어 재개봉되었다.

시나리오와 연출을 맡은 마를린 호리스 감독은 페미니스트 여성감독으로 1982년 <침묵에 관한 의문>을 통해 가부장제에 대한 여성의 분노와 여성들 간의 연대를 보여주었다. <안토니아스 라인>은 다소 결을 달리하여, 여성 4대를 중심으로 한 대안적인 공동체를 보여준다. 감독은 "내가 살고 싶은 유토피아적 세상에 대한 영화"라고 밝힌 바 있다. 즉 영화는 가부장주의를 넘어선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유토피아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우화적이다.

[하나] 모계 4대의 가계도
영화는 네덜란드의 농촌을 배경으로, 일레곤다-안토니아-다니엘-테레사-사라로 이어지는 모성 가족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영화는 생의 마지막 날을 맞은 안토니아의 회상을 통해 안토니아 집안의 역사를 들려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20년 전 고향을 떠났던 안토니아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16세의 딸과 함께 고향에 돌아온다. 안토니아는 어머니와 끝내 화해하지 않는다. 이는 안토니아가 어머니와는 다른 삶을 살겠다는 단절의 의미이다. 안토니아의 아버지는 매춘부들과 어울리다 죽었고, 일레곤다는 죽은 남편을 30년 동안 원망하다가 치매에 걸려 죽는다. 장례식 도중 관에서 벌떡 일어나 환희에 찬 미소를 보이는 일레곤다의 모습은 죽음을 통해 비로소 해방되었음을 가리키는 은유이다.

아비 없는 딸을 데리고 고향에 온 안토니아에 대해 고향 사람들은 따가운 시선을 보낸다. 그러나 안토니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안토니아가 들어오는 마을 담장에는 "환영, 우리의 해방군"이라는 글자가 쓰여있다. 이는 물론 나치를 몰아낸 UN군에 대한 말이지만, 앞으로 안토니아가 마을에 가져올 변화에 대한 복선이기도 하다. 안토니아는 물려받은 농장에 정착하여 살면서, 가톨릭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에 종속되어 있던 마을에 '해방의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안토니아는 마을 사람들의 도움 없이 딸 다니엘과 함께 농사를 짓는다. 하지만 여자 둘이 어떻게 그 많은 농사일을 감당하겠냐고? 안토니아 농장에는 차츰 사람들이 늘어난다. 가령 이런 식이다. 안토니아가 천대받던 지적장애인 루니 립을 도와주자, 그는 안토니아의 농장에 와서 일한다. 오빠들에게 조롱당하고 성폭행을 당하는 지적 장애인 디디를 다니엘이 구출해오자, 디디는 안토니아의 집에서 살게 된다. 둘은 심지어 결혼한다. 20년 전 마을에 들어왔으나, 여전히 이방인 취급을 당하던 바스는 안토니아에게 청혼한 뒤 거절당하지만, 그와 친구이자 연인관계가 된다. 바스와 다섯 아들들은 안토니아의 농장에 들러 힘든 일을 돕는다. 도시에 살던 미혼모 레타가 자신의 아이들을 데리고 안토니아의 농장에 와서 산다. 교회를 떠난 보좌신부도 안토니아의 농장에 깃들고 레타에게 반해 둘이 결혼한다. 다니엘은 미혼모로 딸을 낳고, 딸의 선생님과 동성 연인이 된다. 등등. 이런 식으로 마을에서 소외되고 배척되었던 장애인, 이방인, 미혼모, 동성애자 등이 안토니아의 긴 야외식탁에 모여든다.

[둘] 결혼, 이성애, 모성을 거부하는 그녀들
바스는 안토니아에게 청혼한다.

"나는 홀아비이고, 당신은 과부이고, 또 예쁘고, 내 아들들은 엄마가 필요하고, 당신도 남편이 필요하고..."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결손가정'들끼리 합쳐서 '정상가정'이 되자고 제안하는 바스. 하지만 안토니아는 "나는 아들도 남편도 필요 없다"고. 거절한다. 다만 당신이 가끔 와서 힘든 일을 해주면 나도 답례를 하겠노라 말한다. 이후 바스는 안토니아의 친구이자 안토니아 집안의 지지자가 된다. 몇 년 후 안토니아가 성욕을 느낀다며 함께 사랑할 공간을 마련해 달라고 말하자, 오두막을 짓고 그곳에서 섹스를 한다. 둘은 끝내 결혼하지 않고 연인이자 동반자로 남는다.

다니엘은 결혼 없이 아이만 갖기를 원한다. 안토니아는 다니엘의 도시로 데려가 물색한 남자를 만나게 해준다. 남자를 유혹하여 동침에 성공한 다니엘은 임신한다. 다니엘의 임신은 마을의 신부에게 원색적인 비난을 듣지만, 다니엘과 안토니아는 당당하게 맞선다. 테레사를 낳은 다니엘은 후일 테레사의 여교사 라라에게 첫눈에 반해 연인이 된다. 다니엘은 미혼모이자 동성애자로 살아간다.

천재인 테레사는 4살 때부터 할머니의 친구인 골방 학자인 크룹 핑거와 정신적 교감을 나누며 자란다. 대학에 진학한 테레사는 여러 남자들을 만나지만, 지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의 곁에는 어린 시절부터 테레사에게 한결같은 순정을 바치는 시몬이 있다. 테레사는 시몬과 결혼하여 사라를 낳는다. 그러나 육아는 시몬에게 육아를 맡기고 자신의 공부와 일에 집중한다. 그는 모성애가 없는 어머니이지만, 그에게 모성을 강요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안토니아, 다니엘, 테레사는 결혼, 이성애, 모성 등에 속박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간다. 이들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지닌 채, 자신의 욕망을 이해하는 남성들과 평화롭게 공존한다. 그러나 그녀들의 평화로운 삶을 짓밟는 사건이 일어난다. 동생인 디디를 강간한 일로 마을을 떠났던 피터가 마을에 돌아와 테레사를 강간한다. 영화는 테레사가 강간당하는 장면을 담지 않는다. 강간사건은 한 줄의 내래이션으로 처리하고, 테레사가 가족의 보살핌을 받는 장면과 안토니아가 장총을 들고 피터를 찾아가 저주를 퍼부으며 응징하는 모습을 길게 담는다. 이것은 강간을 다루는 영화적 태도로 기억할 만하다. 강간을 재현함으로써 관음에 빠지지 않고, 피해자에 대한 치유와 가해자에 대한 응징을 훨씬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다. 또한 가해자에 대한 응징이 육체적인 폭력이 아니라, 언어를 통한 사회적 매장이라는 점도 인상적이다. 피터는 이후 다른 이들에 의해 물리적 응징을 당한다.

영화가 강간을 재현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선정적이어서가 아니다. 영화는 섹슈얼리티를 금기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넘치게 재현한다. "사랑은 모든 곳에서 피어났다"는 내레이션과 함께 안토니아와 바스, 다니엘과 라라, 디디와 루니 딥, 파계한 신부와 레타의 섹스를 교차편집으로 담는다. 늙은 이성애 커플, 동성애 커플, 장애인 커플, 성적 경험이 적은 남자와 많은 여자 커플 등의 섹스가 어우러진다. 어린 테레사가 시끄러워 잠을 못 자겠다고 불평할 정도로. 영화가 이처럼 다양한 커플들의 섹스 장면을 교차편집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동성애이든 이성애이든,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늙었든 젊었든, 성적 경험이 많든 적든 아무런 차등이 없는 사랑임을 강조하는 뜻을 지닌다.

영화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중시하는 당당하고 독립적인 여성들과, 기존의 가부장적 질서로부터 소외되고 배척당하였던 소수자들이 모여 이룬 안토니아 집안을 비추며, 그 반대편에 가부장적 질서에 지배되는 피터의 집안을 대조적으로 비춘다. 마을의 가장 큰 농장의 주인인 댄은 자신의 장애인 딸을 마을 사람들 앞에서 조롱한다. 디디를 멸시하던 장남 피터는 디디를 성폭행한다. 집안에서 아무런 힘이 없던 어머니는 디디를 지켜주지 못했다. 디디를 강간한 사건이 알려지자 마을을 떠났던 피터는 이후 군인이 되어 마을로 돌아온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에 유산을 받기 위해서였다. 피터는 다시 테레사를 강간한다. 안토니아의 저주를 받은 피터는 마을 사람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동생에게 살해된다. 대농장을 소유한 번듯한 유지였지만, 가부장적 질서가 강고하게 지배했던 피터의 집안은 근친상간과 형제살해 등으로 망한다. 댄과 얀이 수확기에서 떨어지거나 자신이 기르던 소에 받혀 죽은 것도 상징적이다. 이는 자신이 지배하던 대상에게 죽임을 당한 것으로, 폭력적 지배의 아이러니를 비춘다.

[셋] 학문, 종교, 예술
안토니아가 농부라는 사실도 상징적이다. 안토니아는 떡 벌어진 어깨에 글래머러스한 몸매, 그리고 강한 근력을 지닌 여성이다. 그가 꼿꼿한 자세로 서서 씨를 뿌리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건강한 생명력을 지닌 그가 집안의 가모장으로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신의 뜻에 따라 살고 있음을 상징한다.

그와 반대되는 인물이 골방 학자 크룹 핑거이다. 그는 손가락뿐만이 아니라, 세계관도 몹시 굽어 있다. "가장 좋은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고, 그다음으로 좋은 것은 죽는 것"이라는 염세주의 철학을 지닌 그는 전쟁 이후 골방을 나가지 않는다. 물론 나치가 휩쓴 세상에서, 인류의 지성을 탐독한 학자가 스스로를 유폐한 것은 나름 양심을 지키려는 저항으로 읽힌다. 그러나 그의 지성은 세계에 어떠한 변화도 주지 못한다. 그는 어린 테레사의 천재성을 사랑했지만, 테레사의 아이를 낳겠다고 하자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게 낳은 사라에게 천재성이 없자 그는 실망한다. 그는 비관주의자인 신념에 따라 자살한다. 크룹 핑거의 삶과 죽음은 이성의 극점에 놓인 존재가 품은 근원적인 나약함을 보여준다. 그는 끊임없이 탐구하고 해석하지만,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한다. 영화는 그를 지식인이자 친구로 존중하는 안토니아를 통해 인간의 이성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드러내지만, 그것이 지닌 한계도 명확히 보여준다. 자폐적인 지성의 끝은 죽음이요, 무신론자인 그의 신념처럼 거기엔 아무런 구원도 희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종교에 대해서도 나름 견해를 피력한다. 일레곤다의 장례를 치르러 마을에 온 안토니아는 수녀들을 보고 "아직 멸종하지 않았군"이라 말한다. 그것은 가톨릭 교회가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안토니아가 가톨릭교회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니엘의 임신에 대해 신부가 죄악이라고 강론하자, 그의 성추행을 빌미로 협박하여 강론의 내용을 바꾼다. 안토니아가 가톨릭교회를 전면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신부의 강론 내용을 바꾸는 것은 안토니아가 생각하는 기독교의 본질이 가부장주의나 금욕주의가 아니라는 점을 일깨운다.

종교와 성적 억압에 대한 영화의 생각은 신교도와 '미친 마돈나'의 일화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달을 보고 울부짖는 마돈나는 여성의 성욕에 대한 은유이다. 울부짖는 마돈나의 아래층에 사는 신교도는 막대기로 천정을 치며, 조용히 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그녀의 성욕과 자신의 성욕을 자제시키기 위한 엄숙주의의 몸짓이다. 둘은 끝내 결합하지 못하고 '미친 마돈나'가 죽자 신교도가 그 울음소리를 따라 하다가 죽는다. 둘은 같은 묘에 묻힘으로써 마침내 사랑을 이루는데, 이는 종교적 엄숙주의가 향하는 것이 바로 '죽음을 통해서만 맺어지는 비극적 사랑'임을 가리킨다. 이러한 비극성을 거부하는 인물이 바로 파계한 보좌신부이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던 그는 사제복을 벗고 안토니아의 식탁에서 레타를 만나, 매년 주렁주렁 아이를 낳는다.

영화는 폐쇄적이고 비관적인 학문과 억압적인 종교의 폐해를 보여주면서, 그 대안으로 생명력 넘치는 농사와 예술의 힘을 말한다. 안토니아는 농부이고, 다니엘은 농부이자 화가이고, 테레사는 학자이자 작곡가이고, 사라는 시인이다. 그들은 각자의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여 자아를 실현하고, 가부장제의 바깥에서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낳는다. 이들의 삶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본원적인 창조질서에 어긋나지 않는다. 또한 이들의 공동체는 소수자를 품는 관용과 넉넉한 나눔과 동등한 질서를 지닌다. 그 속에서 개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걸맞은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죽음을 직감한 안토니아에서 출발하여, 그가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숨을 거두고, 죽었던 모든 이들이 그의 식탁에 모여드는 장면으로 마무리한다. 장의사이자 산파인 올가의 존재가 말해주듯이, 죽음은 탄생은 별개가 아니다. 영화는 죽음과 탄생이 맞물려 순환하는 '존재의 춤'을 언급하며 아름답게 끝맺는다.

<안토니아스 라인>의 리얼리즘적인 작품이 아니다. 가령 안토니아, 다니엘, 테레사의 곁에 그녀들의 결정을 존중하는 남자들, 그러니까 바스, 정자를 제공한 남자, 시몬 등 이상적인 남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일종의 판타지일 수 있다. 영화는 그것이 판타지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대안적이고 건강한 판타지이다. 단지 가부장제의 문제점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 그것이 극복된 이후의 공동체가 어떤 질서에 의해 새롭게 정초 될지 상상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어떤 꿈을 꿀 것인가. 그 꿈이 바로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생산자 : 황진미 영화평론가


날짜 : 2016-10-15


파일형식 : 언론기고


유형 : 문서


컬렉션 : 언론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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