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만화 속 성차별, '언니들'이 없애줄게[언론기고]


표제 : 2016 만화 속 성차별, '언니들'이 없애줄게[언론기고]


주제 : 문화운동 ; 기타문화


: 미디어운동 ; 컨텐츠생산


: 여성인권영화제 ; 10회영화제


기술 : 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 벽장 안에는 언니들이 용돈을 쪼개서 열심히 구입한 만화잡지 <댕기>와 각종 만화 단행본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초등학생 꼬맹이가 만화책에 빠져 공부를 소홀히 할 것이 걱정된 엄마는 나에게 벽장 접근금지령을 내렸다.

하지만 만화책속에는 <불의 검> <바람의 나라> <노말시티> <쿨핫> <마니>에 이르기까지 초등학생의 단조로운 삶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흥미진진한 신세계가 펼쳐져 있는데, 그런 게 통할리가 없었다. 나는 틈만 나면 벽장 안에 숨어서 몰래 만화책을 보다가 엄마에게 들켜 혼쭐이 나곤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어린 시절 내내 열과 성을 다해 만화책을 읽어댄 소녀는 나뿐만이 아니다. 코믹스를 사랑하는 팬들의 킥스타터 펀딩을 통해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 <그녀가 꿀잼을 만든다>는 나보다 더한 "만화 덕후 소녀" 출신 여성들의 인터뷰로 알차게 채워져 있다.

어린 시절,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고 어떤 이야기든 만들어낼 수 있는 만화의 세계에 빠져들었던 이들은 성인이 되어 만화가, 코스튬 플레이어, 만화 잡지 편집자, 만화 역사가, 혹은 만화 전문 사서가 되었다.

"만화"와 "여자"의조합이라니, 남자 덕후들이 우글우글한 미국드라마 <빅뱅이론> 속 코믹스숍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릴 사람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영화는 이런 미심쩍은 시선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만화라는 매체가 처음 등장한 1900년대 초반부터 꾸준히 코믹스 업계를 지탱하고 성장시켜온 여성 독자들과 만화가, 편집자들에게서 코믹스에 대한 그들의 애정과 눈부신 활약상을 직접 전해 듣는다.
폭력이 "유머" 코드인 주류 문화에 반발하다

그들 중 일부는 신문 지면에 만화를 그리거나 대형 출판사에서 발행된 유명 코믹스 시리즈의 작가로 활동했고, 몇몇은 남자가 여자에게 휘두르는 폭력을 "유머" 코드로 삼는 언더그라운드 코믹스의 문화에 반발하여 월경, 레즈비어니즘, 여성의 몸 등 다양한 소재들을 솔직하고 도발적인 여성의 시선으로 다루는 언더그라운드 만화 작품들을 만들었다.

1970년대에 페미니즘 운동을 계기로 코믹스 속 여자 캐릭터의 재현에 대한 여성 독자들의 인식이 발전하자 여자 작가들은 여성신문에 페미니스트 만화를 연재하거나, 사상 최초로 여성 캐릭터만 등장하는 언더그라운드 만화잡지를 직접 창간했다.

하지만 그런 활약들이 오로지 물밑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28세의 나이로 대형 출판사 DC코믹스의 퍼블리셔 자리에 오른 자넷칸은 <왓치맨> < 다크나이트 리턴즈> 등 한층 심도 깊고 복잡한 코믹스 작품들을 선보임으로써 코믹스라는 장르 자체를 한 단계 발전시켰고, DC코믹스의 편집장 캐런 버거는 <샌드맨> 시리즈와 같이 기묘한 심리물 시리즈들을 통해 여성 독자들이 즐길 수 있는 취향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하지만 창작의 영역에서 여성들의 활약이 아무리 두드러져도 여성 독자들에 대한 배척은 여전했다. 코믹스숍은 여전히 남성중심적이고,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맨스플레인을 일삼았다.

문제의식을 가진 미국의 여자 코믹스 작가들은 90년대초에 코믹스의 여성 독자들을 결집시키기 위한 비영리단체를 결성하여 여성 독자의 가시화에 나섰다. 90년대말에는 코믹스 콘텐츠의 성차별을 비판하는 여성 독자들도 등장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게일 시몬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코믹스의 여자 캐릭터들이 남자 캐릭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잔인한 폭력의 희생양이 되는 것에대한 불쾌감을 표하며 슈퍼히어로 코믹스 속 여자 캐릭터들의 수난사를 정리한 웹사이트 "Women in Refrigerators"를 개설한 것이다. 그녀는 "남성 혐오", "코믹스 파괴자"라는 등의 비난을 받았지만 보란 듯이 코믹스 작가로 데뷔하여 <원더우먼> <배트걸> 시리즈의 작가로 일했다.

그녀의 웹사이트 덕분에 코믹스 콘텐츠의 성차별에 대한 논의는 더욱 활발해졌고, 여성 독자들이 예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되면서 코믹스 팬덤의 규모도 더욱 성장했다
문화 소비주체로서의 여성이 가시화되다

이런 흐름들은 최근에 한국 사회에서 관찰할 수 있는 현상들과 크게 멀지 않다. 만화뿐만 아니라 음반시장, 도서시장, 영화, 뮤지컬, 연극에 이르기까지 문화산업 전반을 지탱하고 있는 여성 소비자들은 오랜 시간 동안 이상하리만치 가시화되지 못하고 "진정한 팬"이 아닌 타자 취급을 당해 왔다. 어떤 종류의 콘텐츠이건, 남자들은 아무거나 끌리는 대로 좋아하면 되지만 여자들은 뭔가를 좋아한다고 말하기가 무섭게 자신의 진정성을 증명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남자들을 압도할 만큼의 지식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무시당하고, 진정한 팬이 아닌 얄팍한 철새 같은 소비자라는 반응을 받기 일쑤다.

하지만 다양한 페미니즘 운동이 확산되면서 이런 성차별적인 팬덤 문화에 반기를 드는 여성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다양한 취미 공동체 내부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폄하 당하고 배척당한 경험을 공유하는 움직임들, 여성혐오적인 웹툰을 향한 보이콧 운동, 여성 팬덤이나 여성 덕후 집단에 대한 분석, 여성 중심 서사 영화의 단체관람 등 다양한 방식으로 문화 소비주체로서의 여성들을 가시화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이제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여성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자신들이 소비하는 문화 콘텐츠의 여성혐오를 분석하고, 남성 중심적인 팬덤의 문제점을 비판하기도 하면서 자신들이 속한 생태계를 차근차근 변화시켜 가고 있다. 최근에 한국만화계에서 <여자 제갈량> <미지의 세계> <게임회사 여직원들>과 같이 여성 작가들이 그려낸 여성 캐릭터 중심의 웹툰들이 큰 인기를 끌게 된 것도 이처럼 자신의 취향을 정당하게 인정받고 싶고, 자신이잘 공감할 수 있는 서사를 원하는 여성 독자들의 욕구를 반영하는 현상이 아닐까.
장르와 분야를 막론하고 다양한 자리에서 코믹스 업계를 움직여 온 여성들의 인터뷰로 코믹스 덕후연대기를 알차게 정리한 영화 <그녀가 꿀잼을 만든다> 는 마블 코믹스의 슈퍼히어로 시리즈 <캡틴 마블>의 작가 켈리 수 디코닉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코믹스 여성 독자들이 자신의 책을 봤을 때 "여자도 코믹스를 그릴 수 있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일부러 "수"라는 미들네임을 굳이 사용한다는 그녀는 코믹스 컨벤션에서 캡틴마블 의상을 입은 어린 소녀들을 만나는 순간을 가장 값진 경험으로 꼽는다. 언제나 턱을 치켜들고 위풍당당한 자세를 취하는 영웅 캡틴 마블처럼, 코믹스를 사랑하는 여성 독자들이 언제나 "여자도 무엇이든 할 수 있어"라고 믿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란다는 것.

사실 그것은 그녀뿐만 아니라 이 영화의 제작에 참여한 모두의 마음이 아닐까. 한국에도 이렇게 다양한 여성들의 연대기를 기록하고 낙관적인 미래를 설계하는 시도들이 많이 등장하기를 희망해 본다.


생산자 : 경은 여성인권영화제 기자단


파일형식 : 언론기고


유형 : 문서


컬렉션 : 언론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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