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한국여성의전화연합 20주년기념 전국대회 >> 보도협조의 건[보도자료]


표제 : 2003<< 한국여성의전화연합 20주년기념 전국대회 >> 보도협조의 건[보도자료]


주제 : 조직 ; 활동보고


기술 : 한국여성의전화연합은 1983년 창립되어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이제 여성의 전화는 지난 20년간 성과를 바탕으로 새롭게 출발하려 합니다. 스무살 성인이 된 여성의 전화, 축복과 희망의 자리인 20주년 전국대회에 초대합니다. 이에 각 언론기관에 보도요청을 하오니 적극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 한국여성의전화연합 20주년의 역사적 의의


1983년 한국여성의전화연합은 청년여성협의회 회원 과 주부아카데미 회원들 중 뜻있는 분들이 모여 여성운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했고 그분들의 열정은 아내구타에 대한 심각성을 인식하고 상담을 통한 여성운동이라는 합의로 시작되었다. 2003년 이제 2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여성의전화연합은 한국여성운동사의 모델로 우리 사회의 여성인권지킴이로 우뚝섰다. 지난 20년간의 여성의 전화운동의 의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여성의전화연합은 아무도 공적인 문제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여성에게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었던 가정폭력?아내구타의 문제를 우리사회에 처음으로 제기하고 그 해결을 과제로 삼아 20년간 한결같이 가부장제에 정면으로 맞서 왔으며 이를 위해 “무료상담”이라는 평화적인 도구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둘째, 여성에 대한 폭력문제를 여성인권의 문제로 인식하고 아내구타추방운동을 여성인권운동으로 승화시켰다. “여성인권”이란 패러다임은 남성과 여성, 사회와 가정이란 이분법을 깰뿐만아니라 다수와 소주, 정상과 비정상, 같음과 다름의 고정관념을 깰 수 있게 했다. 이 패러다임으로 장애여성, 매매춘여성, 동성애자. 미혼모, 한부모 등 여성 안의 혹은 성적소수자(가부장제 일탈자), 노인여성, 학생등에 존재하지만 보이자 않는 사람들의 문제를 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게 했다.

셋째, 성폭력특별법, 가정폭력방지법 등 여성인권을 보호하고 증진시키기 위해 법을 만들고 제도화하는데 앞장섰다.

끝으로 한국여성의전화연합을 통하여 지역의 많은 여성들이 여성운동을 경험하고 주체가 되었다. 즉 여성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여성들의 힘을 모아 이룩하였다는 것이다. 한국여성의전화연합은 위로부터 만들어진 조직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만들어진 조직이다. 다양한 여성들이 다양하게 만든 조직들이 끈끈한 자매애로 어우러진 것이다.

이러한 운동사적 의의로 볼 때 30주년을 바라보며 한국여성의전화연합은 여성폭력추방에 더욱 매진하며 평화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사명으로 여기고 이를 위해 다음의 세 가지 방향으로 노력하고자 한다.

첫째, 가정폭력, 성폭력 근절을 위해 노력했던 운동영역을 보다 더 넓혀 성매매, 이주여성등 사회환경의 변화가 요구되는 사업에 노력할 것이다.

둘째, 운동의 주체가 될 회원들과 지역여성들의 힘을 더욱 강화 할 것이다.

셋째, 상담을 통한 운동방법에서 미디어, 문화, 정보화 등 대중과 더욱 가깝게 다가갈 수 있도록 전문적인 운동방법을 실천해 나아갈 것이다.

2. 한국여성의전화연합의 20주년사 요약


1) 아내구타추방운동으로 시작

-1983년 6월11일 후원받은전화와 회원개인의 전화 2대를 놓고 상담전화가 개통되었다. 6월11일 개소를 위해서는 1982년 이른 겨울부터 설문조사를 하는 등 많은 준비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본설문조사는 아내구타에 대한 경험이 42.2%라는 높은 비율로 조사되어 사회적으로 높은 관심을 모았다. 이는 민주화운동이라는 사회적환경속에서 여성개인의 문제를 사회적 문제로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다.
-1987년 최초로 여성쉼터 개소, 한국여성의전화는 한국최초로 쉼터를 개소하였으며 현재는 청소년, 노인, 등 여성뿐만 아니라 복지관련시설에 널리 퍼져있는 “쉼터”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한국여성의전화연합은 현재 전국에 7개의 쉼터를 운영하고 있다.
-1989년 가정폭력의 실상과 문제점을 다룬영화 “굴레를 벗고서”제작--이현승감독
-1991년 결혼생활10년동안 남편의 구타에 시달리다 남편을 살해한 협의로 구속된 남00씨의 행동은 정당방위였음을 주장, 6개월의 구명운동 끝에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하게했다.
-1989년 가족법개정운동전개
-1996년 딸을 폭행한 사위를 살해한 이상희할머니 석방을 위한 인권활동
-1997년 매맞아 죽은 여성들을 위한 위령제
-1997년 가정폭력방지법제정

2) 여성폭력으로 확장

-아내구타에 대한 대응운동에서 여성에 대한 모든폭력 특히 성폭력대응운동으로 확대하였다.
-1985년 25세 여성조기정년제 철폐를 위한 토론회
-1987년 파주여종고사태 대책위 활동전개: 학교비리 척결을 요구하던 여학생들이 교사에게 성폭행당한 파주여종고사건 지원활동
-1988년 자신을 성폭력하려던 남자의 혀를 깨물었다가 폭력혐의로 구속된 변월수씨사건으로 한국최소로 정당방위라고 주장하고 구명운동을 펼쳐 무죄판결을 받아냈다. 영화 “단지그대가여자라는이유만으로”나옴.
-1991년 성폭력특별법제정을 위한 정당인 초청간담회등 연대활동
-1991년 자신을 성폭행한 남자를 살해한 김부남씨 구명운동을 펼침으로서 성폭력의 심각성을 사회에 고발
-1991년 최초로 성폭력추방주간행사 주간 이는 현재 세계여성폭력추방주간행사로 전국적으로 진행되고 있음.
-1987년 주소녀씨사건으로 당시 한 금융권에 재직하던 주소녀씨가 결혼을 이유로 퇴직을 강요당하자 여성의전화가 주축이 되어 복직이 가능하게 했다.
-KBS시청료 징수원 사건으로 직장안에서 여성들에게 공공연하게 행재지는 폭력의 형태로 시청료징수원 박성혜씨가 폭력을 당하자 시청료 거부운동에 들어가 사건을 해결했다.

3) 여성인권운동으로 승화

-한국여성의전화연합은 활동의 방향을 여성인권운동으로 심화시켜나갔다. 모혼모의 양육권을 보장하는 문제와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뿐 아니라 다양하고 새로운 가족형태를 인정하자는 열린가족주의 정착을 위한 움직이 있었으며 이는 호주제페지운동과 맥을 같이 한다.
-또한 2000년 이시형할머니의 황혼이혼을 비롯하여 여성들이 이혼을 하면서 한 푼의 재산도 챙기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서 여성의 재산권확보를 위한 운동으로 “부부재산공동명의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4) 여성인권운동의 심화, 확산

-여성인권운동의 심화, 확산 움직임의 하나로 여성의 인권을 얼마나 침해하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윤금이사건, 군산성매매집결지 화재사건을 계기로 성매매추방운동을 활발하게 펼쳐나가고 있다.
-또 중국교포, 필리핀여성 등 인권의 사각지대 이주여성에 대한 인권운동을 위해 매진하고 있다.

5) 이러한 모든 활동은 한국여성의전화연합에서 출발하여 20년 동안 전국에 25개지부와 1개지회 라는 전국적인 조직으로 성장하여 전국에 5,000여명의 회원이 지역에서 여성이 세상을 바꾸는 행동하는 여성인권운동단체로 성장하였다.


3. 한국여성의전화연합이 만든 “한국최초 20” 한국여성운동개척사


1)‘쉼터’ 용어

1987년 3월 14일 사무실 한 켠에서 처음 시작, 6월 전세방으로 독립. shelter house를 발음도 비슷하고 뜻도 좋은 쉼터란 말로 창작, 이제는 위기에 처한 여성들을 위한 비상휴식처, 긴급피난처란 새로운 사회적 개념,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2)‘성폭력’ 용어

당시 성폭력이란 용어가 일반에게 생소할 때, 여성의전화가 일상생활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각종 폭력을 1983년 12월 10일자‘베틀’의 권두언에서 윤리의 이중구조, 성의 상품화 등 성(姓)의 불평등으로 인해 생긴 현상들을‘성의 폭력’으로 개념화했다.

3)‘여성인권’ 용어

1995년 11월에 열린 한국여성의전화연합은 전국간부연수에서 신혜수회장이‘북경여성대회의 성과, 과제, 전략, 행동강령’이란 제목의 발제를 통해 여성의전화 운동은 여성인권운동이라고 정의하였다. 그 후 여성운동은 여성인권의 확대와 증진의 역사가 되었으며 1998년 총회에서 정관을 개정하고 여성의전화는 여성인권운동단체임을 명시하였다.

4)‘아내강간’ 용어

1992~3년 성폭력특별법 제정운동기간 여성의전화는 아내강간도 성폭력범주에 포함시킬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가부장적인 남성국회의원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가정폭력방지법 제정과정에서도 이 조항은 삭제되었으며 결국 지금까지 과제로 남게 되었다.

5)‘상담원 교육’

83년 6월 한국 최초의 여성문제 전문 상담전화를 개통하고 상담원을 모집하고 교육하였다. 상담원 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자신들이 성장하고 변화되는 과정을 거치며 피해 여성들을 지원하고 있다.

6)‘여성주의상담’확립

88년‘여성의전화 상담론 워크샵’94년‘여성상담 심포지엄’95년‘여성상담과 여성복지세미나’98년 ‘페미니스트 카운슬링 워크샵’ 등을 통해 한국여성에게 맞는 새로운 상담패러다임 확립하였다.

7)‘아내구타 실태조사’

‘아내구타’에 관한 실태조사가 1983년 한국 최초로 한국여성의전화연합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서울지역에 있는 708명의 기혼여성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42.2%의 여성이 맞은 적이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고 이를 여성의전화가 사회에 알려냈다. 또한 이 실태조사에서 ‘아내구타’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다.

8) 가정폭력정당방위 최초의 구명운동 - 남00씨 사건 -

1991년 2월 구타남편을 살해한 남00사건은 여성의전화가 최초로 대대적으로 구명운동을 벌인 사건이다. 당시 임신 4개월이었던 남00은 사건당일, 남편에게 폭력을 당해 장이 파열되고 아이를 사산했다. 남00은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으나 여성의전화의 적극적인 구명운동으로 2심에서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9) 성폭력정당방위사건 최초대응 - 변월수씨 사건 -

88년 9월 10일 한밤 중 귀가길에 변월수라는 평범한 주부가 달려드는 강간범의 혀를 잘라 자신을 방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성폭력의 위기에 처한 여성이 취할 수 있는 ‘정당한 자기방어’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을 일으켰다. 여성의전화는 이 사건을 여론화시키고, 시민대토론회를 열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이 사건은 무죄판결을 받아냈다.

10) 성폭력공청회 개최

창립당시부터 여성폭력 관련법 제정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여성의전화는 활동가들이 인신매매단으로 경찰에 연행(1991. 1. 21)된 것을 계기로 1991년 4월 18일 ‘성폭력관련법 공청회’를 열어 성폭력관련법 제정의 필요성을 공식적으로 제기하였다.
그 후 지난한 투쟁을 통해 마침내 1993년 정기국회에서 ‘성폭력특별법’이 통과되었고, 1997년 ‘가정폭력방지법’이 통과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11) 세계성폭력추방주간 소개 및 행사주관

1991년 미국에서 귀국한 신혜수 당시 부회장이 소개하여, 그해 ‘제1회 세계성폭력추방주간’을 주관하고 성폭력희생자를 위한 추모제를 열었다.

12) 부부재산공동명의

상담을 하면서 이혼을 생각하는 여성들이 부딪히게 되는 재산권 문제, 여성노인들의 황혼이혼과 재산권 문제, 여성의 정당한 재산권 확보 등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부부재산공동명의운동은 1999년 12월 10일 부부재산제도 관련 법안을 검토하였고, 이를 시작으로 2000년 5월 부부재산 공동명의 운동을 위한 내부 워크숍, 10월 부부재산 소유현황 및 의식조사, 여성의 정당한 재산권 확보를 위한 토론회 개최 등의 사업을 진행하였다.

13) 사단법인 등록

1993년 여성의전화는 사단법인으로 등록할 것을 결정하였다. 많은 여성단체와 시민단체들이 관변화, 제도화 등을 우려하였으나 여성의전화는 법인화를 통해 지역운동을 확장하고, 신뢰성을 바탕으로 활동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후 여러 단체들도 법인에 등록하였다.

14) 상근활동가 산전산후 90일 휴가제 및 육아수당지급

시민사회단체로는 처음으로 97년 1월에 90일 산전산후휴가제를 도입하였고 지금은 만 3세 미만의 자녀가 있는 활동가에게 월10만원의 육아수당을 지급하고 있다. 활동가복지에 앞장서는 자랑스런 여성의전화! (최초의 수혜자는 누구일까요? 바로 정춘숙 서울지부 부회장으로 그 당시 90일 산전산후 휴가를 받고 태어난 아들이 지금 벌써 7살이랍니다.)

15) 여성호신술강좌 개설

성폭력피해여성들이 피해를 호소할 뿐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1984년 12월 17일부터 10주간 여성호신술강좌가 열렸다. 이후 이 강좌는 사설체육학원의 인기강좌로 변용되었다.

16) 딸들을 위한 캠프

1995년,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자칫 기죽기 쉬운 청소녀들에게 능동적이고 당당하게 자랄 수 있도록 지지하고, 자신의 몸은 스스로 지킨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성교육캠프를 시작했다. 지금은 아들을 위한 캠프로, 대안적인 청소년캠프 프로그램으로 발전하였다.

17) 평등문화를 가꾸는 남성모임

1995년 유재건, 이현승, 김명곤 등의 남성들이 만든 서울여성의전화 남성회원들의 소모임으로 지금까지 남성들의 양성평등의식을 고취하고 있는 소리 없는 교두보이다. 이 모임에서 발간한 자료집 men`s work는 남성들을 위한 좋은 여성학 교재가 되고 있다.

18)‘자라는 우리, 배우는 성’- 청소년성교육교재 발행

1992년 광주여성의전화가 발행한 최초의 여성주의 성교육도서(단행본)이다. 1987년 7월 파주여종고사건은 학교성폭력의 신호탄이었다. 여성의전화는 청소년성교육과 학교내성폭력에 특히 관심을 기울여 ‘청소년 성교육을 위한 교사교육’과 ‘학교내 성폭력실태조사’를 전국에서 실시하고 있다.

19) 여성수첩

손덕수 선생님이 독일을 다녀오시면서 소개한 여성수첩이 1986년 여성의전화 상품으로 재구성되어 첫 선을 보였다. 여성문제 정보서인 동시에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보여주는 징표로서 많은 사람들이 즐겨 가지고 다니는 필수품(?)이 되었다.

20) 가정폭력 관련 영화 제작 - 굴레를 벗고서

1988년 아내구타의 심각성을 사회에 고발하고 대중에게 알리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성폭력 추방을 위한 영화제작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영화제작에 들어갔다. 이 영화는 이현승(당시 30세)씨가 감독을 맡았고 스탭들은 인건비도 받지 않고 빵과 우유로 끼니를 때우면서 갖은 노력 끝에 만들어졌다.


4. 한국여성의전화연합 20주년 기념대회 개요 및 주요수상자 발표


1) 20주년 기념대회 개요

-일시: 2003년 6월 26일 13:00-16:00
-장소: 한국여성개발원 다목적 홀
-주요내용: 내빈초청/ 각 관련단체 축하인사/ 여성의전화 역사속의 주요인물 인사(도움을 받은 분, 도움을 준 분, 주요사건속의 인물)/ 로고, 여성의전화노래, 여성의전화캐치플레이 선포/ 20주년기념비디오상영(역사정리)/ 인권홍보대사 위촉(윤도현밴드)/ 회원한마당(원로부터 현재 회원간의 어우러짐 한마당--이야기가 있는 상 수상, 윤도현밴드공연, 안혜경공연 등)

2) 20주년 기념대회 주요수상자 안내

♠해오름상 (공로상)

이현숙(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상임대표)
1983년 여성의전화 창립을 주도하였으며 당시 운영위원으로 시작하여 1987년 초대 공동대표를 맡은 이래 1998-99년에는 부회장으로, 현재는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20년 동안 여성의전화의 역사와 함께 하면서, 상시적으로 혹은 조직의 고비마다, 때로는 뛰어난 지도력으로 혹은 드러나지 않게 역할을 하면서 여성의전화의 오늘이 있게 한 여성의전화의 선배 지도자이다.

이계경(마고기획 대표이사와 여성문화재단 이사장)
1983년 여성의전화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초대 총무로서 조직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취약한 여건 속에서 당시 여성운동의 동지였던 청녀회 회원들과 함께 초기 여성의전화 운동의 물적 정신적 기틀을 닦는 데 기여하였다. 특히 아내구타추방운동의 사회적 토대 마련을 위한 홍보활동에도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

김희선(국회의원)
1983년 여성의전화 창립을 주도하였으며 1984-86년 초대 원장, 1987년 초대 상임공동대표로 활동하였다. 여성에 대한 폭력 추방운동과 함께 여성의 생존권 투쟁, 군사독재타도를 위한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초반기 여성의전화의 운동의 방향을 확립하고 한국사회에 여성에 대한 폭력추방 운동을 뿌리내리는 일에 기여하였다.

이화수(아주대학교 명예교수)
1983년 초대 운영위원장으로서 여성의전화 창립의 숨은 공로자이다. 미국에서 교포들에 대한 아내구타 상담을 하였던 경험으로 아내구타 문제의 중요성을 역설하여 여성의전화가 아내구타 문제를 사업으로 채택하는 계기를 가져왔다. 아내구타 문제에 대해 불모지였던 당시 이 문제에 대한 교육을 하는 등 이론적 뒷받침을 하였다.

♠햇살상 (감사상)
한국존슨, 롯데마그넷 (지속적인 재정후원을 주셨습니다.)

정희경
님은 1970년대 후반부터 이화여고교장, 서울시 카운슬러협회 회장과 해외동포모국방문후원회 이사를 지내면서 1984년 한국여성의전화 초대이사장으로 활동하였다. 현재, 청강학원 이사장 및 상임이사로서 여성사회단체, 교육단체 등을 꾸준히 지원하고 있다.

박인덕
님은 1979년부터 1987년까지 대한YWCA 실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1984년부터 86년까지 한국여성의전화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현재는 경기도 발전위원회 위원으로서 여성운동의 뜻을 정책적으로 실현하고 있다.

노영희
님은 1973년 매일 경제신문사 기자생활과 1979년부터 서울 YWCA에서 활동하다가 1987년부터 1989년까지 한국여성의전화 공동대표를 역임하였다. 1984년 <실천문학>을 통하여 시인으로 등단한 그는, 1993년 여성의전화 10주년 기념시 ‘기댈 산을 주고자 했네’를 발표하였다.

손이덕수
님은 1987-88년 한국여성의전화 이사장, 1989년 공동대표, 1994-2002년까지 이사를 역임하였다. 1993년부터 97년까지 대통령 정책자문기획위원, 효성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현재는 개혁국민정당 여성회의의장으로 일하고 있다.

김계정
님은 한국여성의전화 제1기 상담원으로서 가정폭력 관련 운동을 현장에서 펼쳤으면, 1990년부터 92년까지 한국여성의전화 대표를 역임하였다.

이문우
님은 1993년부터 95년까지 한국여성의전화 회장을 역임하였다. 1975년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총무와 한국기독교가정생활위원회에서 발행하는 ‘새가정’의 발행인, 기독교평화연구원 원장, 한국여신학자협의회 공동대표, 기독교여성상담소소장을 지내고 현재는 한국여성의전화연합 감사로 활동하고 있다.

구훈모
님은 1984년 여성의 전화 자원봉사 상담원을 시작으로 여성의전화에서 회원활동을 하면서 여성학공부를 하여 여성학강사와 필자로 활동하고 있다. 1993년부터 95년까지 한국여성의전화 부회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상덕
님은 1985-88년 한국여성의전화 교육부장, 1995-98년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상임부회장(서울여성의전화 회장)을 역임하였다.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 여성부 대외협력국장, 대통령 비서실 여성정책비서관으로 일하였고 현재는 안성여자기능대학 학장으로 있다.

민경자
님은 1995년 청주여성의전화 초대회장을 지내며 청주여성의전화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1998년부터 99년까지 한국여성의전화연합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현재는 충남여성정책개발원 정책개발부장으로 일하며 여성운동이론의 정립에 애쓰고 있다.

♠늘 푸른 소나무 상(모범활동가상)
박신연숙
1992년 3월부터 상담 활동으로 여성의전화와 인연을 맺었다.
95년 11월부터 상근 활동을 시작하여 상담부 간사, 성폭력상담센터 부장, 교육조직부, 사무차장을 지냈으며 현재 서울여성의전화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자그마한 몸에서 뿜어내는 여성운동의 열정과 신념 그리고 늘 회원과 함께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여성의전화 활동가의 모범을 본다.

신하영옥
1993년 10월 울산여성의전화 준비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여성의전화와 인연을 맺었다.
1994년 4월 울산여성의전화 창립의 산파역할을 하였으며, 사무차장등을 거쳐 현 울산여성의전화 사무국장을 활동하고 있다.
조직의 어려운상황에서도 항상 중요한 것을 잃지 않으며, 원칙과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그의 당찬 모습에서 우리는 여성의전화 활동가의 모범을 본다.

♠물결상(특별상)
안향자, 안향숙, 안향옥
님들은 군산, 광주, 전주 지부에서 모범적으로 활동하는 세자매 활동가로써, 이들의 여성운동에 대한 애정과 타의 모범이 되는 자매애로 회원활동의 귀감이 되고 있다.

♠해맞이상(회원활동상):전국지부에서
다음 25명의 회원들은 지역여성운동의 현장에서 회원활동의 모범이 되었다.

안양자(서울지부), 박근양(서울강서양천지회), 이경숙(인천지부), 권미라(수원지부), 김정혜(성남지부), 박용선(강화지부), 고향옥(안양지부), 남궁성자(시흥지부), 함경숙(전주지부), 박효숙(광주지부), 김옥향(부산지부), 장진아(대구지부), 이채경(울산지부), 정진경(청주지부), 이수현(창원지부), 최충민(군산지부), 노하수(천안지부), 김경희(익산지부), 고주희(광명지부), 정금안(영광지부), 박정아(김해지부), 김경숙(부천지부), 최정희(진해지부), 이숙경(김포지부),황미숙(목포지부)

♠로고상(20주년을 맞이하여 로고를 변경하면서 전국단위 공모를 하여 당선되셨습니다.)
디자인 애드 권연정


5. 한국여성의전화연합 20주년기념 인권홍보대사 윤도현밴드 소개 및 인터뷰 내용


1) 인권홍보대사 윤도현밴드 소개

올해로 창립 2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여성의전화연합에서 인권홍보대사로 윤도현밴드를 위촉하였다. 윤도현밴드는 1995년 "타잔"으로 데뷔하였으며, 가창력과 폭발적인 라이브 실력,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자질을 인정받고 있다. 올해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해 늦깎이대학생이 된 이 밴드의 보컬 윤도현씨는 평소에도 "자유와 인권을 노래하는 음악인으로 살아가겠다."는 꿈을 갖고 있으며 최근에 국회앞에서 파병반대 1인시위를 하는 등 이상을 꿈만으로 남기지 않고 실천하고 있다.
그동안 폭력과 차별받는 여성들의 인권활동을 활발하게 해온 한국여성의전화연합은 청년세대를 대표하는 윤도현밴드를 인권홍보대사로 위촉함으로써 여성에 대한 폭력근절을 위한 인권운동이 일반시민에게 인식될 수 있도록 홍보하고 특히 폭력문화에 쉽게 노출되어있는 청소년들에게 인권, 평화운동의 의미를 심어주고자 한다.

오는 6월 26일 한국여성의전화 20주년기념대회에서 위촉장을 전달할 예정이며 윤도현밴드는 인권과 평화를 위한 한국여성의전화연합 활동을 함께 하게 된다.


2) 인권홍보대사 윤도현밴드 인터뷰 내용


Q. 한국여성의전화연합의 인권홍보대사를 맡게 된 계기와 소감은?

A. 먼저 저희 윤도현밴드가 인권홍보대사로 임명되어 영광입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여성문제나 인권문제가 단지 개인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가 함께 풀어가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침 이번에 한국여성의전화연합에서 저희에게 좋은 기회를 주셔서 인권홍보대사가 되었습니다.


Q. 우리나라에서 가장 심각한 여성문제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A. 여러 가지 문제가 있겠지만 가장 심각한 여성문제는 가정폭력, 성폭력 등 여성에 대한 폭력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여성폭력은 단순히 여성 또는 그 가정만의 문제가 아닌 또 다른 사회문제를 만드는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Q. 윤도현밴드 맴버중에 가장 양성평등적인 분은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사이좋게 추천해주시면) 그분이 여성들에게 하고픈 이야기는?

A. 저희 맴버 중 누구 한 사람을 지목하기 어려울 정도로 멤버 모두가 수직보다는 수평적 사고를 가지고 있고, ‘양성평등’ 역시 단순히 페미니스트의 조건이 아닌 자연스럽게 실천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성의 권리는 여성 혼자만의 문제가 아닌 남성들과 함께 풀어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려고 노력하면 꼭 더 나은 방법이나 대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Q. 미군장갑차에 의해 숨진 여중생사건 등 사회현안에 관심이 많고 진보적인 가수로 알려져 있는데 한국에서 대중가수로서 활동하시는데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많은 운동가적 이미지가 덧씌워지는게 상업적으로 별로 도움이 안될텐데, 이런 활동을 하는 이유와 계기가 있다면?

A.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다만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분노할 일에는 분노하고 해선 안 될 일에는 ‘아니다’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운동가가 아닌 음악인이기 때문에 제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음악’을 통해 평소 저의 생각과 소신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Q. 윤도현씨의 경우 결혼을 하고 나서 개인적으로 변화된 생활이나, 변화된 인생관이 있다면? 또 결혼을 했더니 좋은점과 나쁜점이 있다면?

A. 한국여성의전화연합 분들이 궁금해 하실만한 질문이겠지만 제가 원래 결혼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결혼해서 좋고 편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저의 사생활이니까요.


Q. 앞으로의 활동계획은? - 음반과 사회적 활동 모두

A. 요즘 윤도현밴드의 새음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희 음악이 세상을 모두 담아낼 수는 없겠지만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데 일조할 수 있도록 한곡 한곡 신중하게 작업하고 있습니다. 음반이 나오면 그 다음은 당연히 콘서트를 하게 되겠죠. 그리고 인권홍보대사로서 저의 목소리를 낼 자리가 있다면 소신을 가지고 활동할 생각입니다.


Q. 아마도 이번 기회를 통해 여성운동하는 활동가나 회원들을 만날 기회가 있으셨을 텐데 특히 여성의 전화 활동가들에게 느끼는 점이 있다면? 그리고 하고픈 이야기는?

A. 여성운동가라고 하면 막연히 ‘여전사’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데, 실제로 만나면 되려 ‘굉장히 여성스럽다’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차분한 말씨로 여성의 입장을 조리 있게 대변하는 분들을 볼 때면 저희가 다 속이 시원해집니다. 앞으로도 불이익을 당하는 많은 여성들을 위해 노력해주시리라 믿고, 이제까지 해오셨듯이 남성들과도 큰소리로 맞서기보다 어머니처럼 포근히 이끌어 그 안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간다면 어려운 문제도 쉽게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생산자 : 한국여성의전화연합


날짜 : 2003-6-26


파일형식 : 보도자료


유형 : 문서


컬렉션 :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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