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가정폭력 가해자가 피해여성을 고립시키는 방법[언론기고]


표제 : 2016 가정폭력 가해자가 피해여성을 고립시키는 방법[언론기고]


주제 : 여성폭력추방운동 ; 가정폭력


: 미디어운동 ; 컨텐츠생산


: 여성인권영화제 ; 10회영화제


기술 : 가정폭력이 크게 문제라 생각하지 않는 그 이유, 혹은 가정폭력이 심각한 문제라 여기는 그 이유에는 공통적인 게 있다. 바로 친밀성이다. 친하다는 것, 많은 것을 공유하는 관계라는 것. 바로 그 동일한 이유로, 둘 사이의 문제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기도 하고, 또는 정말 누구도 견뎌서는 안 되는 일로 정의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입장 중 어느 하나를 견지하는 것은 가능할까? 올바름의 차원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말이다. 그렇게 처참한 피해를 당하고도 영화에서처럼 "그의 좋은 면이 생각이 난다"며 서러운 눈물을 흘리는 피해자에게 우리는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혹은 느껴야 하는가? "저 지경이 되고도 좋다고 하니 이제 말릴 재간이 없다"고 해야 하는가? "저 여성을 저렇게까지 만든, 바로 그것이 폭력의 효과다"라며 분개해야 하는가?

가정폭력, 친밀성

모두가 다 이해가 간다. "나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라며 눈을 부릅뜨고 위협하는 가해자의 그 태도도, "내가 때린 게 아니라 다른 데서 맞고 들어온 것"이라며 발뺌하는 또 다른 가해자의 뻔뻔함도 다 이해가 간다. 그간 여성들이 사랑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폭력을 감내해왔고, 남성들의 거짓말에 동조해 왔었으니까. '그와의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리며 눈물짓는' 피해자도, '그가 진짜 반성하는 것처럼 보여서 그와의 재결합을 생각하는' 피해자도 다 이해가 간다. 누구의 연인이 될 자격이 있는가로 여성을 평가하고, 또 그것으로 여성의 가치를 매기는 사회 속에서 살아왔었으니까.
자신을 죽음의 위협으로 몰고 간 그 가해자를 두둔하고 마음 아파하는 피해자, 마치 다시없을 원수에게 하듯 무자비한 폭력을 자신의 연인에게 행사하고도 분에 못 이겨 하는 가해자만큼이나 지켜보는 자들도 혼란스럽다. 이 혼란함과 헷갈림 속에서 어떤 감정선을 따라야 하는 걸까. 그 일을 겪고도 또 아무렇지 않은 듯 웃고 있는 피해자가 있고, 보석 기간 동안 가해자와 별다른 동요 없이 만나고 식사를 한 피해자도 있다. 이 모든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누구를 원망할까? 누구를 비난해야 하는가?

눈치채셨는가? 피해자의 동선을 따라왔다는 것을, 피해자를 주시해 왔다는 걸 말이다. 피해자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피해자의 현 모습을 통해 피해사실이 내게 전달되는지, 그래서 가여운지, 아니면 고개가 갸우뚱해지는지를 말이다. 엄청난 피해사실에 피해자를 동정의 시선으로 보다가,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가해자를 만나는 피해자에게 화가 나기도 하고, 법정에서 가해자를 마주하고 난 후, 거리에 쓰러지듯 울고 있는 피해자를 보며 답답함을 느끼는 그 모든 과정에서 어쩌면 우리는 피해자를 우리의 방식대로 통제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폭력의 중심에는 통제가 있다

폭력의 가장 중심에는 통제가 있다. 통제는 기본적으로 무섭고 위협적인 방식으로 공포심을 조장하지만, 때로는 처연한 슬픔과 연민을 자아내기도 한다. 가해자들이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울면서 처절하게 매달리는 것,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듯 고개를 떨구는 그 모든 것은, 그러나 믿기 어렵겠지만, 그것마저 통제 행위이다. 통제의 목적은 상대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움직이게 하고,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손에 넣는 것, 자신의 계획대로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이기에 우리는 어떤 행위뿐 아니라, 행위를 통해 어떤 상황이 전개되는지를 살펴야 한다.
자신을 죽음의 위협으로 몰고 간 그 가해자를 두둔하고 마음 아파하는 피해자, 마치 다시없을 원수에게 하듯 무자비한 폭력을 자신의 연인에게 행사하고도 분에 못 이겨 하는 가해자만큼이나 지켜보는 자들도 혼란스럽다. 이 혼란함과 헷갈림 속에서 어떤 감정선을 따라야 하는 걸까. 그 일을 겪고도 또 아무렇지 않은 듯 웃고 있는 피해자가 있고, 보석 기간 동안 가해자와 별다른 동요 없이 만나고 식사를 한 피해자도 있다. 이 모든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누구를 원망할까? 누구를 비난해야 하는가?

눈치채셨는가? 피해자의 동선을 따라왔다는 것을, 피해자를 주시해 왔다는 걸 말이다. 피해자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피해자의 현 모습을 통해 피해사실이 내게 전달되는지, 그래서 가여운지, 아니면 고개가 갸우뚱해지는지를 말이다. 엄청난 피해사실에 피해자를 동정의 시선으로 보다가,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가해자를 만나는 피해자에게 화가 나기도 하고, 법정에서 가해자를 마주하고 난 후, 거리에 쓰러지듯 울고 있는 피해자를 보며 답답함을 느끼는 그 모든 과정에서 어쩌면 우리는 피해자를 우리의 방식대로 통제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폭력의 중심에는 통제가 있다

폭력의 가장 중심에는 통제가 있다. 통제는 기본적으로 무섭고 위협적인 방식으로 공포심을 조장하지만, 때로는 처연한 슬픔과 연민을 자아내기도 한다. 가해자들이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울면서 처절하게 매달리는 것,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듯 고개를 떨구는 그 모든 것은, 그러나 믿기 어렵겠지만, 그것마저 통제 행위이다. 통제의 목적은 상대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움직이게 하고,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손에 넣는 것, 자신의 계획대로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이기에 우리는 어떤 행위뿐 아니라, 행위를 통해 어떤 상황이 전개되는지를 살펴야 한다.


생산자 : 허민숙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파일형식 : 언론기고


유형 : 문서


컬렉션 : 언론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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